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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Sep 02. 2024

고순씨의 김장하는 날

< 키워드: 김장 >



* 키워드 '김장'/ 장르: 짧은 소설


(얼마 전 지인이, 주말 농장에 배추를 심을 거라고 했습니다.

직접 기른 배추로, 김장을 해 먹는 맛이 아주 좋다고요.

그래서 쓰게 된 짧은 소설 <고순씨의 김장하는 날>입니다.)



<고순씨의 김장하는 날>


새벽 4시,

잠자기를 포기한 고순씨가 이부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려, 잠은 허구한 날 자는 건디···”     


어제 열심히 배추를 나르고, 무채를 만들어주느라 고생한 둘째 아들 녀석이 깰까,

불도 켜지 않은 채 나갈 준비를 한다.

왜 그렇게 불을 안 켜고 어둡게 생활하냐고 하지만, 고순씨는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옷걸이 한쪽 포장도 뜯지 않은 머플러에 잠시 시선이 가지만, 고순씨는

오래되어 보풀이 잔뜩 난 머플러를 꺼내 목을 칭칭 감는다. 나이가 드니 목덜미가 시리다.     


“엄마, 내일 해 나기 전에 배추 씻을 거니까 그렇게 아셔요.

 걱정 마시고 푹 주무셔 ”     


안주를 만들어주겠다는데도 굳이 라면을 끓여 소주를 마시던 둘째 아들은

행여 고순씨가 일찍 깰까 당부를 했었다. 하지만 어차피 잠도 오지 않는데, 쉬면 뭐 할까.

어제 혼자 고생한 둘째 아들 녀석이 좀 더 단잠을 잘 수 있도록, 채비를 마치고

문밖으로 나간다.

배추는 잘 절여졌을까?

김장 경력 40년이 넘은 베테랑인데도 걱정은 나이가 들수록 늘어간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니,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든다.


“많이 안 추워야 쓰는디...”


그래도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이 어디인가 싶다.

작년엔 비가 많이 내려서, 배추를 날라주던 둘째 아들 녀석이 허리를 다칠 뻔했다.

큰아들 내외는 새벽 일찍 출발한다고 했는데, 그전에 배추를 다 씻어놨으면

하는 것이 고순씨 마음이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고무장갑도 김장용 고무장갑이 따로 나왔다.

안감이 기모 처리가 되어 있어, 손가락이 덜 시리다.

팔꿈치까지 충분히 올라오는 고무장갑에 큰 며느리가 작년에 사다 준 털 장화를

신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 속까지 든든하다.  

   

절인 배추는 세 번을 나눠 씻는다. 여럿이 씻으면 금방인데, 혼자 씻으려니 더디다.

그래도 아직 칠흑 같은 어둠이 물러나질 않았으니 고순씨 마음이 놓인다.

해가 나기 전에 부지런히 배추를 씻고 또 씻는다.

고순씨는 이상하게도 무언가를 씻는 걸 좋아한다. 차가운 물에 더러운 것들이

씻겨져 나가고 깨끗해지는 걸 보고 있으면 마음속 찌꺼기도 조금은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올해는 배추가 참 잘되었다. 벌레 먹은 것도 별로 없고 속이 알차게 예쁘다.

허리가 아파 잠시 몸을 일으켜보는 고순씨, 언제 왔는지, 길고양이가 “냐옹”하며 다가온다.

밥을 챙겨줬더니 언제부턴가 밥때가 되면 찾아온다.

언젠가는, 고순씨 앞에 쥐를 물어다 줘 깜짝 놀랐는데, 이 녀석도 칭찬이 받고 싶은가 보다 싶어

‘그려, 잘했다. 잘했어. 이뻐, 이뻐’ 해줬더니, 녀석은 이제 좀 더 가까이 고순이에게

다가온다. 서두르지 않으면서 조금씩 곁을 내주는 녀석이 고순씨도 예쁘다.     


“ 아, 엄마도 참...”     


언제 일어났는지 둘째 아들 녀석이 나온다. 어제 혼자 소주를 마시더니 얼굴이 퉁퉁

부어 있다.  


“밥은 먹은 겨?”

“밥은 무슨. 엄마 일하고 계신데...”

“얼른 들어 가, 속이 뜨셔야 일도 하지...”

“입맛 없어요. 배추 씻을 테니까 엄마나 한술 뜨고 오셔.”


고순씨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고집 센 둘째 아들은 여러 말하는 걸 싫어한다.

결국, 둘 다 아침도 안 먹고 배추를 씻는다. 손이 빠른 둘째 아들 녀석이 나오니, 일이 금방 끝난다.     

배추를 다 씻어놓고 미역국에 말아 밥을 먹고 나니, 큰아들 내외가 도착한다.

큰 며느리는 연신 죄송하다 죄송하다 한다.


“일 다니는 애가 여기 오는 것만 해도 고맙지, 뭐가 죄송하다 그런댜.”


그것보다 손주 녀석들이 오지 않은 게 섭섭하다.

무슨 공부를 주말에도 하는지, 주말에도 쉬지 못하는 손주 녀석들이 안쓰럽다.

어릴 적에는 방학만 되면 할머니 집에 오던 녀석들이 학교에 들어가면서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 보기가 힘들다.

어쩌다 집에 와도 조그마한 핸드폰만 바라본다.

아이들마저도 사는 게 각박한 거 같아 고순씨는 마음이 씁쓸하다.     

배추 속에 들어갈 양념을 버무리는 건 아들들 몫이다.

하지만 큰아들은 시늉뿐, 둘째 아들이 진두지휘한다. 손끝이 야무져 일을 참 잘한다.

저렇게 일을 살뜰하게 잘하는 녀석인데 왜 이렇게 일이 잘 안 풀릴까.

고순씨 마음에 찬바람이 훅 지나간다.     


김장 속까지 다 준비해놓고 나니, 지원사격 두 명이 온다.

언제나 김장 때마다 품앗이로 서로의 김장을 도와주는 대길엄마와 다른 집 김장 도와주느라

고순씨 집엔 한 번도 온 적 없는 용희 엄마다.


“몇 포기랴?”


대길엄마가 묻는다.


“이, 한 150 포기 되나벼.”

“ 아니, 먹을 사람도 별로 없으면서 뭔 김장을 그렇게 많이 한댜?

큰아들네나 많이 가져가지, 둘째 아들도 혼자 먹으면서...”


용희 엄마 말에 대길엄마가 용희 엄마 옆구리를 툭 찌른다.


“아. 그렇지...”


눈치 없는 용희 엄마가 그제야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는다. 말로 제살을 깎아먹는 사람이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큰아들네 40 포기, 혼자 사는 둘째 아들은 10 포기,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고순씨네는

30 포기면 충분하다.

그런데도 고순씨가 김장을 많이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다.

반대한 결혼 때문에 연을 끊고 사는 막내딸이 걸려서다.

고집 센 고순씨 남편은 막내딸을 참 애지중지했다.

무뚝뚝한 사람이 막내딸 앞에서는 헤벌쭉 웃음이 헤펐다. 학원 한 번 안 보냈는데 공부도

곧잘 했다. 시골에서 수도권에 있는 대학에 붙었다고 동네 사람들 축하가 대단했다.

그런 막내딸이 부모도 없는 고졸 출신 남자를 데리고 와 이 사람과 결혼시켜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하니, 남편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깡 말라서 복 없어 보이는 얼굴도 별로였다. 그와 함께라면 우리 딸의 삶도 궁상맞을 듯해서 불안했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엄마가 돼서 딸아이가 아기 낳는 것도 보지 못하고, 딸아이 아기 낳았을 때 미역국도 끓여주지 못하고,

딸아이를 닮은 아이도 보지 못하며 세월만 축내고 있으니, 다 부질없다 싶다.

살아 보니 사람 좋고 성실하면 그만인데, 괜한 아집으로 딸을 잃었다.

남편이 간암으로 죽었을 때도 장례식장 앞을 서성이던 딸아이를 본 사람이 있다고는 하는데,

고순씨에겐 그것도 다 꿈만 같다.

간신히 연락처를 알아내 집으로 전화한 적이 있었다. 집으로 찾아가겠다 했더니 찾아오면

이사 가겠다며 어찌나 성을 내는지, 그 뒤론 연락도 못 했다.

고집이 센 건, 지아빠를 똑 닮았나 보다.

그래도 언제든 연락이 올지 모르니 김치냉장고도 하나 사뒀다.

잘 저장만 해놓으면 금방 한 것 같은 김장을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열심히, 배추에 속을 넣는 사이, 고순씨가 막 삶은 머릿 고기와 소주를 내온다.


“한잔 들 하면서 햐...”


술 좋아하는 용희 엄마는 침부터 삼킨다.


“그려 이 맛이지. 김장에 수육에 쇠주랑, 이 맛으로 김장하는 겨”


술이 한 잔 들어가니 더 수다스러워진다.


“큰 며느리도 한잔 혀”

“네, 그럼”


소주 한 잔만 먹어도 얼굴이 빨개지던 아인데, 소주를 세 잔 째 넙죽넙죽 받아 마시니

고순씨가 큰며느리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쟤가 언제 저렇게 술이 늘었댜.’


그러고 보니 큰며느리 눈가에도 주름이 늘었다. 귓가에도 희끗희끗 새치가 눈에 띈다.


‘막내딸 얼굴에도 주름이 생겼을까?

손가락이 길고 예뻤는데, 지금도 그럴까?’


자식이라는 것은 자신의 일부와 같아서 매 순간 떠오르게 마련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자식과 비슷한 또래의 사람을 보았을 때도, 몸이 아플 때에도,

생일이 되면 거짓말처럼 몸이 아파온다. 지울레야 지울 수 없는 것이 자식이다.

막내딸 생각을 하니, 고순씨는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답답해진다.


“나도 한 잔 줘”

“이? 웬일이랴? 술을 다 찾고...”


대길엄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술을 따라준다.

빨간 속을 배추에 채워 넣고 있으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깨를 토닥여 주고

‘엄마 아~’하며 조그만 입을 벌리던 딸이 떠오른다.

눈치가 빨라서 엄마 아빠가 화가 나 있으면 재잘재잘거리며 기분을 풀어주던 딸이었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답답한 속 때문에 숨이 쉬어지질 않을 것 같다.     


‘그려, 오지 말란다고 가지 않은 내가 미친년이여, 내가 미쳤지...’


후회가 사무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저기, 용희네 트럭 있잖여? 그거 나 좀 하루만 빌려줘”

“배추 남은 거 동생네 갖다 줄라고 그런댜?”

“이. 그려그려...쓸 데가 있어서 그랴”


김치를 담그는 고순씨 손이 빨라진다.

차곡차곡 담은 김치랑 김치냉장고랑 트럭에 싣고 둘째 아들을 앞세워 내일은 가야겠다.

     

‘에미니께,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어야 하는 건디, 나이를 헛 먹은겨, 어찌 이렇게

예전이나 지금이나 망설이기만 할까, 답답한 사람 같으니라고...’


빨간 속이 자꾸 뿌옇게 보인다.

빨리 김장을 마쳐야 하는데, 마음만 급하다.

다행히 날씨가 많이 차질 않다. 올해는 일찍 첫눈이 온다는데 꼭 눈 오기 전처럼

날씨가 포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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