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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olo Sep 09. 2020

왜 우리는 스스로 읽어야만 하는가?

- 동물 농장이 남긴 잔상과 짧은 생각에 관하여


 1945년에 간행된 동물농장을 읽고서 문득 커다란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질문은 이렇다 “당신은 2020년 오늘날과 1945년이 얼마나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선사한 기술의 안락함으로 채워진 편리한 우리의 일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약 100년 전의 오웰이 보았던 ‘세상과 사회 그리고 인간군상’과 2020년의 오늘날이 얼마나 다른지에 대하여 나는 과연 알고 있었던가? 이런 의문과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후 으레 찾아오는 만족감이 아닌 왜인지 모를 불편함과 그 근원을 찾아야 할 것만 같은 느낌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물 농장의 모순과 비극은 아이러니하게도 농장의 동물들이 인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은 시점부터 시작된다. 또한, 이는 나에게 남겨진 불편함의 근원을 찾기 위한 시발점이기도 했다. 메이저 영감이 죽기 전 남은 동물들에게 남긴 “인간만 여기서 몰아낸다면 모든 굶주림과 고된 노동의 근원이 영원히 사라질 거요.”란 말은 인간에게 지배당했던 시점까지만 유효했음을 동물들은 과연 알고 있었을까? 그렇게 장원 농장의 지배자는 인간에서 동물들로 바뀐다.


 이후 인간과 다를 바 없이 동물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역할은 자연스럽게 돼지들이 맡게 된다. 그들은 동물 중 똑똑했기에 직접 노동을 피하고 다른 동물을 지도하고 감독하며 지도자 대접을 받게 된다. 이는 동물 주의 원칙을 담은 동물 칠 계명 중 “7. 모든 동물은 다 평등하니라.”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었다. 암소에게서 짜낸 우유와 과수원에서 수확한 사과의 배분 문제를 두고 ‘우리는 일종의 두뇌 노동자입니다. 우리가 우유와 사과를 먹는 건 다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라는 스퀼러의 말은 돼지들 하의 농장 지배체제를 확고히 하는 순간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는 돼지를 제외한 동물들에게 닥칠 비극의 전주곡이었다. 


 인간의 지배에서 막 벗어난 시점의 동물들 간의 모든 합의는 ‘기록’으로 남겨지지 못하고 불완전한 기억에만 의존했다. 이후 동물의 적이라는 인간들과 거래를 하겠다는 결정이 통보됐을 때 또한, 동물들은 기록이 없기에 자신들이 잠깐 착각한 것이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슬프게도 이런 동물들의 ‘착각’은 돼지들만의 이익을 위해 이용됐고 끊임없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동물 농장을 위해 누구보다 헌신했던 복서가 도축업자의 수레에 실려 팔려갈 때 또한 오직 글을 읽을 수 있는 벤저민만이 복서를 탈출시켜야 한다고 동물들에게 외쳤을 뿐이다. 또한 ‘증거’도 없이 스노볼과 내통했다는 주장만으로도 많은 동물이 공개처형을 당해야만 했다.


 왜 동물들은 이런 비극을 멈추지 못했을까? 돼지들을 제외하고선 글을 읽을 수 있는 동물들이 거의 없었다. 잔인하게도 읽을 수 없다는 것은 남은 동물들에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오히려 돼지들이 주창하는 ‘모든 동물을 위한’ 일이라는 말에 순응하도록 했을 뿐이다. 읽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비극이었던 것이다. 스스로 생각할 수 없었기에 끊임없이 이용되고 순응하고 만 것이다.


 순응한다는 것과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존재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몇몇 동물들에게는 분명히 '이건 사실과 다른데'라는 의문과 그 뒤로 그들의 기억이 존재했다. 하지만 동물들에게 있어서의 기억은 기록되지 못했기에 나약하고 희미했다. 그렇기에 그런 의문을 가진 채로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기억의 존재조차 희미해지면, 그 자리에는 순응함만이 남게 된다. 그렇게 남은 동물들은 순응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렇다면 과연‘ 2020년의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어디에 가까운가?.’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 떠올랐고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사회 곳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스퀼러와 양들의 외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매스 미디어를 통해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외침에 대해 순응했던가,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가? 내가 가지게 된 불편함의 근원은 바로 우리의 오늘날과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을 통해 그려냈던 사회와 인간군상이 여전히 닮아있다는 점 때문임을 나는 알게 됐다, 아주 지독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동물농장에 불어 닥친 비극은‘주체적인 사고의 부재’에서 시작됐다. 이는 글을 읽고 쓰지 못함과 결합하여 돼지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새로운 정책의 필요성을 설파했음에도 동물들에게 돌아온 것이 ‘어리석음과 무관심’이었다면, 이는 동물들이 자초한 것과 다름 아니게 된 것이다. “동물농장의 결정은 다수결을 원칙을 따라야 했지만 다른 동물들보다 머리가 좋은 돼지들이 모든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는 걸 다들 이해했다”라는 상황을 이해하지 않음으로써 모두를 위한 결정이 시작된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2020년의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정책은 ‘돼지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들은 대체로 똑똑하기에 많은 사람들은 동물농장 속의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보다 똑똑하니까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말로 이런 상황을 단지 이해할 뿐이다. 동물 농장 속의 다른 동물들과 달리, 오늘날은 누구나가 글을 읽고 쓸 수 있다. 하지만 넘쳐나는 정보와 전문가들의 ‘편집된’ 생각을 통하여, 오히려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과정을 귀찮아하고 불편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자연히 주체적인 사고의 부재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 구조와 환경은 결국 21세기에서조차 ‘돼지들’만을 위한 결정과 길을 우리 스스로 터주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가 남겼던 말을 주목해야 한다. “21세기의 문맹이란 쓰지 못하고 읽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배우지 못하고, 학습한 것을 잊지 못하며, 새로 배우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앨빈 토플러는 결국 우리가 끝없이 스스로 사고해 나가야 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동물 농장의 동물들이 문맹이 아니었더라면, 책 속에 그려진 끝없는 동물들의 비극보다는 인간을 쫓아낸 후 다졌던 그 결의와 꿈을 실현해나가는 희극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렇 다면 21세기의 우리 또한 마찬가지로 문맹을 벗어남으로써, 비극이 아닌 희극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정보의 홍수로 불리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정보를 얻는 것 자체보다 정보의 사실 여부를 구분하는 것에 더 큰 어려움을 겪는 세상이다. 그렇기에 주체적인 사고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동물농장의 돼지와 양들과 같은 사회 엘리트와 전문가의 외침에 순응하고 말 것이고, 이는 우리 모두에게 비극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기록되지 못한 기억은 나약하고 희미하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기록된 기억은 강렬하고 선명하다. 조지 오웰이 1945년에 남긴 ‘동물농장’또한 기억의 ‘기록’ 일 것이다. 20세기의 기록이자 기억이다. 우리는 오늘날 사회의 ‘돼지들’과 나머지 동물을 이러한 책(기록)을 통해서 확인하고 구별할 수 있는 분별과 사고를 얻을 수 있다. 결국, 우리는 20세기 동물농장의 비극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 앨빈 토플러가 말한 ‘21세기의 문맹’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지난 ‘세상과 사회 그리고 인간군상’의 기록된 기억들은 책이란 이름으로 우리 곁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모두 책을 집어 들 차례다, 우리 모두의 희극을 위해서 



스스로에게 단 하나의 질문도 던지지 않는, 던질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이는

아마도 동물 농장의 돼지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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