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그리고 삶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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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난다. 그래서 결국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저런 사람들에 파묻혀 살아가는 탓에 우리는 이런 생각을 좀처럼 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
삶은 나로부터 시작되는데, 나를 모르니 삶을 알 수 있을 리 없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는데, 남을 제대로 볼리는 만무하다. 무관심한 세태와 인간성의 상실은 과연 우연일까.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갑다 그래서 제대로 잡을 수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대한민국 사람의 성질과 기질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그렇다. 이런 사람이 많으면 이런 사회가 되고, 저런 사람이 많으면 저런 사회가 된다. 뜨거운 사람들과 차가운 사람들도 잘 부대끼다 보면 따뜻하기도 시원해지기도 할 테다. 온정이 없다는 것과 무정은 분명히 다를 테다. 성격이 있다와 예의 없다가 분명히 다르듯이. 지금의 우리는 예의가 있는 걸까? 나는 이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할 자신이 없다. 나라도 예의가 있어야지 그런 생각뿐인걸 어쩌나.
삶을 살아가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다. 항상 좋은 일만은 있을 수가 없고, 항상 나쁜 일만도 있을 수가 없다. 달리 말하면 삶에는 정답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오답도 없다는 말이다. 마치 날씨에도 정답과 오답이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장마철이 불편하다고 비는 오지 말아야 하나?. 불혹이 넘어서도 자신이 인생이 주인공이길 바라는 또는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편하다고 했었다. 그런 사람들에겐 비가 불편할 것이다. 누구에겐 정말로 필요한 비가, 자기에겐 그저 불편함일 뿐일 테니까. 그런 자신을 모르니, 남을 어찌 알까. 사람과 함께 하는데, 정답인 사람이 있고 오답인 사람이 있나? 우문우답의 끝없는 반복이다. 애석하게도 정답과 오답을 자신 있게 구분할 수 있다는 바보들이 지천에 있다. 나는 오늘도 속으로 다짐한다. '바보'는 되지 말자고. 천성이 소심하여 나지막이 마음속으로만 다시 되뇐다. 바보는 되지 말자고.
인생의 묘미는 멈추지 않는 데 있고, 끊임없이 변하는 데 있다. 인생은 결국 시간이다. 각자의 엔딩, 그 시간의 끝을 미리 알 수 있다면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지금 보다 수 천, 수만 배는 더 증가할지도 모른다는 슬픈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오늘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신께 기도 한다. 하나님이건 부처님이건 알라신이건 관계없다. 건강이라든지 명예라든지 등의 지극히 개인적인 소원을 가진 채 말이다. 나 조차도 삶이 조금 고되고 괴로울 때면, 치사하게 절을 찾아 진실로 정말 절정의 순수로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다. "건강을 주시고, 투자가 잘되게.."라며 지극히 순수하지 않은 나약함과 욕망을 한껏 담아 말이다. 인생에도 일시정지가 있다면, 모든 종교는 사라졌을 것이다. 정지와 다시 시작 버튼이 있다면, 그런 삶은 지금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삶과는 아주 많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삶이란 한 치 앞도 알 수 없기에 그게 사람이기에 우리는 오늘도 삶이 주는 불확실성과 불안을 위안삼을 초월적 존재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 보다도 우리에 목을 매는지도 모르겠다. 함께한다는 것이 주는 안도감과 안정감은 멋모를 자신감도 선사하기에 말이다. 그래서 친구를 여전히 찾는다. 친구와 함께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성실히 간다 그래서 삶은 불안하다. 일기예보는 일기 예보일 뿐이니까. 우물쭈물하다 보면 늦는다. 나를 알기도 전에 삶이 끝날지도 모른다.
"우물쭈물 살다가 이렇게 끝날 줄 알았지" - 조지 버나드 쇼
(오역 논란이 있지만 워낙 이렇게 유명해진 문구라 그대로 차용)
창밖을 통해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것이 묘하게 즐거웠다. 비가 오는데 집에 어떻게 갈까 가 아니라 그 순간의 운치를 만끽할 뿐이었으니까.
같은 장소이지만 그저 각기 다른 시간일 뿐이기에 정답도 오답도 없다. 나는 그저 바라볼 뿐이니까. 마주할 뿐이니까.
3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