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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S 새우와 명품백, 그리고 나의 여름

와이프님 명품백 사주기 프로젝트 2탄

by 파도 작가
지난 1탄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꼭옥 아래 링크 1탄을 읽고 오시면 이해가 빠릅니다. 고도의 전략입니다. ㅎhttps://brunch.co.kr/@papafish/198


와이프님의 최종 승인이 떨어졌다.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꼭 새우를 팔아 명품백을 사줘야 한다! 칼퇴 후 새우 키우기 공부 대작전을 수행했다. 새우 물생활 카페에 가입, 관련 글을 모두 읽기 시작했다. 신세계였다. 물고기와는 또 다른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었다. 애완새우의 분류, 새우 계통에 따른 생육 조건, 어항 세팅 방법, 물 관리 요령 등등의 글을 프린트해 정독했다. 내가 이렇게 공부를 열심하는 인간이었나? 아무튼 그렇게 한 달간 공부한 뒤 드디어 첫 애완용 새우, 이름도 찬란한 CRS(Crystal Red Shrimp)를 입양했다.

나는 전략가다.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입문용 CRS를 먼저 입양했다. 다행히 입문용 CRS는 한 달 동안 잘 살아주었다. 안심이 되었다. “그래, 이 정도 환경이면 매우 합격이다!” 그제야 마음을 놓고, R100 F1(다음 세대, 작은 개체) 10마리를 어렵사리 분양받았다. 아파트를 분양받을 때보다 더 기뻤다.


어항은 30cm 정사각형 두 개를 세팅했다. 오른쪽은 입문용, 왼쪽은 R100 F1을 위한 어항. CRS 어항은 커다란 여과 장치가 필요 없었다. 작은 스펀지 여과기 하나면 충분했다. 그러나 생육 조건은 매우 까다로웠다. 특히 pH, 온도, 먹이가 중요했다. 워낙 몸이 허약해 생육조건이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바로 용궁행 기차에 올라탄다고 새우 카페 고수님들은 신신당부를 했다.


“내가 과연 잘 키울 수 있을까? 만일 CRS가 죽으라면… 아 명품백은 어떻게 사준단 말인가! 아 내 돈 ~ 돈도 없는데…”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자는 게 내 철칙이었기에 나는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CRS 키우기에 몰입했다.


가장 중요한 생육조건이 있었다. 바로 pH를 약산성(6.6~6.9)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점은 24시간 365일 변화 폭을 0.5 이내로 유지해야만 했다. 이 조건을 맞추기 위해 새우 전용 소일(Soil)과 연갈탄으로 세팅을 했고 증발된 물을 자동으로 보충하는 보충 수조도 운영했다. 박테리아제도 주 1회 투여했고 환수도 매주했다.


이런 노력으로 점차 CRS는 발색이 좋아졌고 드디어 6개월 만에 CRS 아가들이 태어났다. 총 5마리였다. 크기가 약 0.3mm 정도로 작아도 너무 작았다. 너무도 작지만 명가 혈통 R100 CRS 답게 당당하게 빨간 줄무늬 패턴이 선명하게 있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매일 퇴근을 기다려졌다. 아기 새우들이 잘 있는지 너무도 궁금했다. 그러던 중 카페에서 고급정보를 하나를 더 얻었다. 유기농 뽕잎이 아기 CRS의 발색과 건강에 좋다는 소식이었다.

주말에 왕복 8시간을 운전해 시골 아버지 집으로 달려가 뽕잎을 직접 따왔다. 그렇게 나의 정성 속에 CRS는 잘 자라 주었고, 어느덧 CRS 개체 수가 100마리가 넘어갔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이대로만 유지된다면 명품백 두 개도 가능하겠는어 으하하하하!" 흥분되었다. 하지만 나의 흥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8월, 겪어보지 못한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다. CRS는 PH는 물론 온도 편차에도 매우 민감했다. 항시 25도 온도들 유지해야만 했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출근 전 얼음팩을 어항에 넣어놓고 선풍기를 켜두고 출근했다. 하지만 8월 한여름 오후에는 실내온도가 30도를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주말에는 에어컨으로 유지했지만 평일 아무도 없는 집에 차마 에어컨을 켜 놓을 수는 없었다. 잠깐이니 괜찮겠지, 지금까지 잘 키웠으니 괜찮을 거야 생각했다. 하지만 큰 오산이었다.


데미지가 축적된 새우들 중에 몸이 약한 친구들부터 하나둘씩 죽기 시작했다. 허망했다. 이렇게나 약하다고? 이렇게나 민감하다고? 나름대로 애썼는데… 억울했다. 결국, 소중했던 CRS는 8월, 그 무더운 여름에 모두 사라졌다. 명품백도 함께 사라졌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와이프는 묻는다. “여보 명품백은 도대체 언제 사줄 거야?”


요즘 나는 어항을 바라볼 때면 정원처럼 고요했던 그날이 떠오른다. 초록의 모스 수초 위를 작은 발로 앙증맞게 움직이며 귀여운 표정을 짓던 CRS. 단아한 고추잠자리 같고 새초롬한 다람쥐 같던 새우들이 있어서 행복했던 그날말이다.


용궁으로 떠나간 새우들은 무사히 도착했을까? 용왕님은 만났을까? 다음엔 꼭 다시 키워보리라. 이번엔 더 튼튼한 혈통의 CRS로, 다시는 용궁으로 보내기 싫다. 그저 오래오래 함께 살고 싶다. 이번에는 눈높이를 조금 낮춰 명품백은 아니더라 카드지갑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와이프님! 이번에도 승인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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