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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즈플 Sep 04. 2023

스타트 라인에 서다

늑대물린여자 06



세 번째 재발이었다. 왼쪽 발등에 세 번째로 다시 옮겨 붙은 봉와직염을 익숙하게 처치해 준 동네 가정의학과 선생님은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채었다. 

그는 내 발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역시 별다른 상처가 보이지 않는 게 의아하다고 했다.


"큰 병원에 가서 여쭤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아무 이상이 없는 몸에서 항생제를 계속 먹는데 새로운 염증이 생기는 경우는 흔치 않아요."


그렇게 말해준 의사 선생님이지마는, 정작 내가 어느 과로 가서 진료를 의뢰해야 하냐는 질문에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온 대답은 “혈관 내과… 일까요?”라는 되물음이었다. 

그걸 나한테 왜 묻나. 나는 환자고 전문가는 선생님이신데. 

그러나 고통이 지긋지긋했기에 그의 말을 한 귀로 넘기는 바보 같은 일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믿는 구석이 있었다. 마침 2주 뒤에 큰 병원의 신경외과에 외진을 가는 날이었다. 나는 2년 전 전조성 편두통이 발병해 이후로 꾸준히 신경외과 진료를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큰 병원의 주치의를 만나는 김에 내 요즘 몸상태와 다른 병원 의사 선생님의 소견을 함께 말하여 이 의문스러운 증상에 해결책이 나오기를 바랐다. 2주 뒤, 열심히 몸 상태에 대해 피력하면서 난 말했다.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요. 뭔가 넘어가기에는 제 몸이 이상해요.”


나는 너무나 지쳐있었다.

내가 아무렇지 않다고 다른 사람들은 말하는데 나는 왜 이리도 아픈 걸까. 어디가 문제인 걸까. 나에게서 원인을 찾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마 마음 한구석에서 속삭이고 있었던 것이리라. 이건 신체증상이 맞다고. 너의 몸 어딘가가 무너진 것이라고.

다행히 신경외과 선생님은 내 증상들을 들어보고 고민 끝에 협진을 내려주었다.


"젊은 여성한테 그런 큰 일은 없을 텐데 혹시 모르니까요. 검사나 한번 받아봅시다."

“네? 류마티스 내과요?”


류마티스 내과에서 내가 받게 될 검사가 무엇인지, 신경외과 선생님이 어떤 질병을 의심하고 있던지 들어보지도 못한 채 나는 종종걸음으로 그 과로 향했다. 기뻤다. 나을 수 있겠다는 희망보다는 알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들어서였다. 내가 왜 아픈지 알 수 있다는 희망.


깜깜한 터널 속을 몇 개월 간 헤매다가 드디어 왜 아픈지에 대한 원인을 들을 수 있다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적어도 예전과는 달리 뭔가 진전이 되는 것 같지 않나. 만약 여기서도 문제가 없다고 하면 이제는 정말 내 예민함 탓이다. 그렇게 믿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진료실의 문을 열었다.






루푸스 환자들은 진단을 받기 전까지 많은 시간 스스로를 의심하고 살아가야 한다. 심지어 류마티스 내과에서조차 처음 방문 당시 자기가 담당할 환자들은 이렇게 멀쩡하게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류마티스과 초진 당시 나는 관절이 아프면 정형외과를 가면 된다, 키보드를 그만 만지고 쉬면 된다는 다른 전문의들과 같은 소리를 들었다.

  

“협진이 들어와서 검사는 할 건데……. 아우, 아니에요.”


내가 무슨 병으로 의심되는지 말해주지도 않으면서 아닐 거라고 단정 짓는 주치의를 보며, 괜히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봉와직염이 가라앉은 타이밍이라 사진을 들고 갔더니 지나간 건 보여주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아팠는데, 지금도 아픈데. 입이 뻐끔뻐끔 열렸다가 닫혔다.


물 위에 나온 물고기처럼 할 수 있는 언어가 없이 무언가 잘못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기가 잔뜩 죽은 채 피를 뽑고 나오며 괜히 긍정적인 자기 계발서 속 주인공처럼 ‘그래, 운동을 좀 더 열심히 해보자!’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다시 현재이다. 폭풍 같은 반년. 많은 전문가들이 젊은 여자는 그럴 리 없다고, 스트레스성이다. 날씨가 더워서 그렇다. 일시적인 것이다. 영양불균형이다.라고 말한 것과는 달리 나는 '루푸스'라는 질병에 걸려 있었다. 

그들이 내려준 처방대로 몸을 움직이는 것은 나에게는 결과적으로 독이 되었다.


물론 안다. 동네 의원에서 희귀병 환자가 찾아오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하지만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루푸스에 대해 경계할 수 있는 예민함을 갖고 있었다면 나는 좀 더 나를 덜 자책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전문가들의 말을 잘 듣는다. 상대가 권위적일 때 더욱 잘 듣게 되고는 한다. 그러나 권위적이라고 하여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다. 명확한 증거와 함께 답을 내어주지 않을 때는 아무리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내 몸에서 보내는 신호에 더 귀 기울여줘야 한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사람들은 대부분 쉽게 그런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들이 나보다 더 잘 아니까. 더 많이 배웠으니까.





진단을 받기까지 참 되었다. 

이제 막 스타트 라인에 섰는데 나는 기진맥진, 혼곤한 정신으로 휘청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뒤에는 쌩쌩한 늑대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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