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물린여자 22
“너희는 엄마 치매 걸리면 꼭 버려라.”
잠시 서울에 올라온 엄마와 TV를 보며 저녁을 먹다가 보험광고가 나왔다.
고령화 시대, 치매인구가 늘어난다는 광고 문구에 엄마는 여상하게 이야기했다. 에이, 그게 무슨 말이야~ 동생과 내가 하는 말에 엄마는 진심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집에서 모신다고 스트레스받지 말고 요양병원 같은 데다 보내 꼭. 같이 살지 마.”
아픈 사람이랑 같이 살면 무슨 고생이니? 상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는 것처럼 몸서리를 치고는 식사를 이어갔다. 요양병원에 보내는 건 절대 버리는 게 아니라는 걸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며 화를 냈고 곧 드라마가 시작되며 화두는 묻혔다.
며칠 뒤 엄마가 일터로 내려가고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며칠 전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나는 엄마가 자신을 버리라고 한 말이 속상했다고 말했지만 동생은 나와 의견이 달랐다.
“나는 엄마 마음 이해 가는데?”
“응?”
“나는 그렇게까지 오래 살고 싶지는 않아.”
“가족들한테 신세 지고 폐 끼치느니 몸이든 마음이든 병들면 그냥 빨리 죽는 게 낫지.”
그 말이 내 폐부를 찌른 까닭은 지금 내가 가족들에게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자격지심이 들기 때문일까.
치매인구 100만. 실감이 잘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숫자이기는 한다. 발병 후 평균 20년을 모셔야 하는 가족들의 노고가 엄청나다. 단순히 기억력을 잃고 끝나는 문제가 아닌 인지를 앗아가는 병, 치매.
괜히 ‘착한 치매’라는 말이 있겠는가. 일반적인 치매는 그렇지 않다는 뜻과 일맥상통하기 때문 아닐는지. 망상, 환각, 성격변화, 갑작스러운 행동변화 등 치매환자의 보호자들은 소중한 사람이 변해가는 걸 옆에서 지켜보며 고통스러워한다. 서서히 내 소중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란 어떤 느낌일까.
안다. 엄마와 동생이 말하는 의미가 어떤 말인지. 치매에 걸려 고생하는 가족과 암에 걸려 나가는 병원비로 흔들릴 가정에 대한 걱정.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으리라.
그런 생각의 끝에서 사람들은 내가 만약 환자가 된다면 그냥 죽는 게 낫겠다.라는 말을 내뱉을 수도 있으렷다 싶었다.
하지만, 병에 걸린 가족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심장에 물이 찼다. 5월 초 응급실까지 가서 괜찮다고 했던 내 몸은 기실 괜찮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난 후 모든 게 나아질 줄만 알았던 나는 2주 뒤 급하게 응급실을 찾았다. 온몸에 생긴 발진과 열 때문이었다. 루푸스로 인해 생긴 원판모양의 붉은 발진은 손과 발부터 시작해 온몸을 뒤덮었다.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은 나는 침대도 없이 미어터지는 공간 속에서 맨바닥에 누워 24시간을 넘게 검사결과를 기다렸다. 류마티스 과를 담당하는 의사가 대학병원 내에서도 제일 적었기 때문에 협진을 넣고 나면 시간이 가장 많이 소요된다고 했다.
하루 꼬박 지난 후에도 입원자리가 나지 않는 와중, 검사 결과에서 이상이 발견되었단다. 심장과 폐, 신장부분에 물이 찼다고 하더라. 그래서 지금까지 누울 때마다 압박감과 함께 아팠던 거라고 한다.
아, 그랬구나. 이것 봐라.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잖아. 근데 왜 다 내가 이상하다고 몰아갔던 걸까.
억울함과 안도감이 마구 뒤엉켜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내게 설명하는 의사에게 말해봐야 소용이 없을 테니까.
병원을 바꾸라던 엄마의 외침과, 지금이라도 병원을 바꾸어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교차했다. 의사라서 믿은 것이 잘못일 수 있나? 나보다 전문가의 말을 믿지 않으면 누구의 말을 믿겠는가.
일단 집으로 돌아와 주 2회 대학병원을 오가는 삶을 지내고 있었다. 한번 안 좋아진 몸은 좀체 예전의 상태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스케줄로는 어차피 회사는 못나갔었겠다."
웃으면서도 내가 관해기(완화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기간)가 와도 언제 또 이렇게 아플지 모르겠거니 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람일은 어찌 될지 모르니까.
정상궤도로 올려놓는다고 해도 언제 다시 툭 떨어질지 모르는 나는 가족들에게 폐가 되는 사람일까. 동생과 엄마의 말에 따르면 나는 경제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필요 없는 가족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이 한 번도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이라 더욱 날카롭게 벼려진 칼 같았다.
당장 그 말을 한 건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따듯한 배려심이 더 크리라. 하지만 실제로 병을 앓고 있는 가족 구성원에게 그 말은 꽤나 아프게 와닿을지도 모른다. 혹은 어느 날 병을 앓게 될 가족에게 나는 쓸모없는 구성원이 되었다는 생각의 나무로 자라게 될 씨앗이 될지도 모른다.
아이 참, 너한테 하는 말은 아니야. 언니랑은 상황이 달라.
분명 내 가족들은 날 소중히 생각한다. 내가 대놓고 물어본다면 분명 저렇게 이야기하겠지. 하지만 과연 그들의 상황과 나의 상황은 무엇이 다를까?
나는 평등한 관계가 되고 싶다. 가족들이 내게 그늘이 되어주듯, 가족들에게 언제나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주고 싶다. 사람 인(人)은 서로를 받쳐주는 글자이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무작정 받쳐주는 글자가 아니다.
그러니, 그런 아픈 가정의 말 대신 차라리 내가 아프기 전에 무엇을 하자느니, 아프면 어떤 것을 하자느니라는 말을 입에 담았으면 좋겠다. 아픈 사람도 함께 미래를 그릴 수 있도록.
언젠가 나나 가족이 아플 때,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반짝이는 씨앗을 심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