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왠'
집 앞의 안경점에도 현수막이 내걸렸습니다.
폐업정리
70-80%
요즘 들어 집 주변에 저런 현수막들이 많이 걸립니다. 원래는 참으로 다양한 가게들이 즐비한 골목 상권이 존재했는데, 지금은 그 상권이 무색하게 텅텅 빈 가게들이 늘어납니다.
아이들이 하는 모래성놀이처럼, 사방에서 모래를 가져가 가운데에서 아슬하게 흔들리는 빨대 깃발처럼 불안감을 증식합니다.
모두들 대견하게도 그런 일상 속에서도 열심히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습니다.
"아, 나 블루라이트 안경 새로 맞춰야 돼."
동생의 말에 저도 가지고 있는 안경에 기스가 난 걸 떠올립니다.
"언니 한국어 쓴다며."
아, 잘못 말했습니다.
기스가 아니고, 흠. 흠입니다.
갖고 있는 안경알에 흠이 나면 사물을 볼 때 어떤 사물을 보든 그 흠이 덮어 씌워집니다. 그 흠과 함께 사물을 보게 됩니다.
참 모순적입니다.
앞을 잘 보기 위해서 안경을 쓰는 건데, 안경알 모양의 세상에 갇혀 모든 사물을 알 모양 안으로 가두어 봅니다. 안경알 위의 흠집을 덮어 씌워 재단하고 서로의 안경을 비웃습니다.
동생을 따라 안경점에 들어가니 단발머리 안경사 사장님이 저희를 반깁니다.
"다음 주까지 문을 열지도 모르겠어요. 마음 같아서는 확 지금 닫아버리고 싶어."
오랫동안 장사하셨다는 사장님은 단골손님도 많은 모양입니다. 끊임없이 손님들이 들어와 가지고 있는 안경을 문 닫기 전에 다시 반질반질하게 바꾸어달라고 요청하고 갑니다.
저희는 구석에서 다양한 안경테들을 썼다가 빼기를 반복하며 서로 키득거립니다. 안 그래도 눈 옆에 여백이 많아 안경만 쓰면 얼굴 옆이 꽉 낍니다. 제게 안경이란 도구가 눈 보호의 요소 그 이상으로는 절대 기능하지 않습니다.
동생은 그 와중에 투 브리지 안경이라는 새로운 디자인을 배워왔다며 멋을 부려본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웬만하면 가벼운 거 써~"
오랫동안 내 얼굴에 걸쳐져 있을 거라면 최대한 가벼운 게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는지. 동생 눈에는 또 다른 이미지가 보이나 봅니다.
동생이 안경을 고르는 모습을 막냇동생에게 찍어 보내면서 잠시 멈칫했더랍니다.
왠? 웬? 뭘 써야 하지?
가족 단톡방이니 이 정도는 틀려도 상관없겠지 싶다고요? 제 맞춤법을 가장 많이 지적해 주는 건 다름 아닌 제 동생들입니다.
이놈의 웬 왠. 알고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꼭 툭 튀어나온 보도블록처럼 갑자기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 요령이 좋아서 헷갈리는 맞춤법을 다르게 바꾸어 불렀습니다. 웬만하면을 그냥 엥간하면으로 바꾸었더라죠. 그럼 아무도 제가 틀린 걸 모르고 저도 배우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꼭 맞춤법을 알고 사용해야만 하는 때가 왔습니다. 처음에는 불편하게 느껴졌는데 그 단어가 적확하게 들어갈 곳을 알고 나면 그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습니다.
'왠'은
왜 그런지 모르게, 왜인지, 뚜렷한 이유 없이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왠은 단독으로 사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왠을 '왜인지'의 준말로 외웠었어요. 그럼 웬/왠을 사용해야 할 때 그 자리에 왜인지가 대치되지 않으면 왠이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웬'은
어찌 된, 어떠한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단독으로 사용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왠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문장에서는 '웬'이 맞는 표현이라고 봐도 된다고 합니다.
단독 사용이 처음에는 어떤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예를 들면,
"처서 지나면 가을날씨라며! 32도? 이게 왠 말이야?"
"처서 지나면 가을날씨라며! 32도? 이게 웬 말이야?"
여기서 단독으로 사용 가능한 단어는 '웬'이므로 아래 문장이 옳은 표현입니다.
혼자 핸드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자니 동생이 등짝을 찰싹 때립니다.
"안경은 골랐어?"
"있는 거에 알만 바꾸려고."
"이쁜 걸로 하나 사지."
안경에 대해 모르니 뭐가 잘 어울리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결국 과감하게 바꾸지 못하고 알고 있는 세상, 익숙한 세상에 소심하게 흠만 없애보기로 합니다.
그래도 예전보다 깨끗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며, 세상을 바라보는 해상도를 한층 촘촘히 한 것에 위안을 삼으며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여러분은 내게 잘 어울리는 패션 아이템을 잘 고르시나요?
나에게 잘 어울리는 아이템은 어떻게 하면 바로 골라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