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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야 Feb 15. 2021

오늘, 하루 또 살아냈다

[퇴사 후 인생 2막 아빠 에세이]

“남자가 돈이여?”


다찌에 앉아 있던 40대 후반의 남자가 주인장과 얘기하다 다소 흥분한 듯 소리를 높였다. “맨날, 돈 돈 돈! 그렇게 벌어다 줘도 돈타령만…. 남자가 돈으로만 보이지.” 단골 술집 카운터 바에 어쩌다 보니 중년 남자 넷이 각자 혼술을 하고 있었다. 그중 2차인지 3차인지 제일 취해 보이는 중년 남자가 주인장에게 넋두리를 해댔다. 한국에서도 그럭저럭 먹고살았는데, 마누라가 하도 돈 돈 돈해서 실컷 돈이나 벌어다 주자고 중국 가서 사업하다 쫄딱 망했다고 했다. 싸드(THAAD) 때문에. (아내 얘기 들으면 얘기가 달라질 거다 아마.) 돌아와서 이 일 저 일하다 오늘 첫 출근인데, 동료들이 축하해 준다고 회식하다 말고 술 취해 사라졌다고. 술값도 안 내고. 이래저래 힘들어 보였다.


그 맘 안다. 이심전심. 돈 쓰고 저렇게 취해서 들어가면 집에서 또 깨질 거라는 것도. 그래서, 나도 한잔한 김에 한마디 거들었다. “힘들죠? 아빠들은 힘들면 힘들다고 하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맨날 딴 얘기만 하죠. 상사 뒷담화, 직장 동료에 대한 불만, 내 맘대로 안 되는 처자식 이야기까지. 사실 다 나 힘드니 알아달란 얘기인데 말이죠. 아빠도 힘들면 울어도 돼요. 힘들면 우세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혼술 하던 중년 남자들 눈에 다들 눈물이 맺혔다. 들키지 않으려 애쓰면서. 내 말을 들은 이 40대 중년 남자는 대놓고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술기운에 툭 건드리니 애써 감춰두었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거다. 손을 잡아주고, 등 한복판을 쓰다듬어주었다. 나도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심정이 그 심정이니까.


대한민국 아빠들, 먹고살려고 무던히 애쓴다. 가장으로서 가족들 책임지려고 투잡도 마다하지 않는다. 내가 대리했던 어떤 대리기사님도 투잡을 뛰었다. 새벽 1시경 태워드렸는데, 보통은 자정 무렵 귀가한다고 했다. 원래 통근 버스 기사라서 새벽 6시에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잠이 모자라지 않냐고 물었더니 대리기사 출근 전 조금 잘 시간이 있다고 했다. 오후에 잠깐 눈 붙이고 또 대리운전을 나선다고 했다. 예전에는 회사 다니다 퇴직하고 횟집을 2년 하다 접었다고 했다. 후배가 기술 전수까지 해 준다고 해서 가게를 물려받았는데, 잠깐 배운 기술로는 어림도 없었다고. 폐업하고, 통근 버스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돈을 더 벌어야 해 투잡으로 대리기사도 하게 된 거고.


얼마 전에는 ‘투잡 뛰던 50대 가장, 야간 운전 중 전봇대 충돌 사망’이라는 안타까운 기사도 있었다. ‘오후 10시 50분쯤 부산의 한 도로에서 경차가 전봇대를 들이받아 운전자 56살 A 씨가 그 자리에서 숨졌다. 경찰 조사 결과 숨진 A 씨는 낮에 학원을 운영하고, 밤에는 농산물 시장에서 배달 일을 하는 등 이른바 투잡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가 난 시간에도 A 씨는 배달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경찰은 숨진 A 씨가 피곤한 상태에서 운전하다 사고를 낸 것으로 보고 정확한 경위를 조사 중이다.’ 이 기사를 접하고 너무 슬펐다. 아빠만의 잘못일까? 사지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사회 현실이 서글펐다. 가정에 한 푼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식당에서 허드렛일하는 엄마들 또한 수두룩했다. 아빠 사업 실패로 이혼하고, 투잡 하며 애 키우는 엄마들도. 자영업 해보면 안다. 안타깝다.


지나가던 오토바이가 쓰러져 있었다. 넘어진 오토바이에 한쪽 다리가 낀 운전자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다행히 곁을 지나던 행인들이 꺼내 일으켜 세웠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보니 50대 중후반 남자였다. 한눈에 봐도 호리호리한 게 사무직에나 어울릴 인상이었다. 일으켜 세운 오토바이를 보니 퀵 서비스였다. 진짜 아빠가 달리다 넘어졌다.

진짜 달리다 넘어진 아빠


이렇게 힘든 일과를 마치고 나면, 술이라도 한잔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게 대부분 아빠의 낙이다. (물론 술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 잔 술에 넋두리하며 힘든 일과를 털어낸다. 어쩌다 보니 술 취한 새벽 화장실 소변기에 중년 남자 셋이 나란히 비틀거리며 볼일을 보고 있었다. 볼 빨간 사춘기도 아니면서 볼 빨간 중년 남자 셋이 한 손에 부여잡고 앞뒤로 흔들거리며 똑같은 리듬을 타고 있었다. 순간 저들이 왜 술을 마셨는지 알 것 같았다. 같은 마음일 것 같았다. 술기운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같은 박자로 흔들거리는 진동 때문이었는지도. 그냥 그렇게 취하고, 그렇게 견디고, 그렇게 흔들거리는 모습이 다 같은 아빠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흔들거리는 모습이 흔들거리는 우리네 삶 같았다. 그 흔들거림은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 또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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