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인생 2막 아빠 에세이]
처음 회사 때려치운 걸 아신 날, 아버님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셨다. 70 평생 처음이셨다. 전에는 자식 앞에서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내 마음도 아팠다. 불효하는 것 같아서. 대기업에 취직했을 때 그렇게 좋아하셨다. 우리 아들이 대기업에 들어갔다고. 알게 모르게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셨다. 나이가 많아 취직이나 할까, 걱정이 컸던 만큼 기쁨도 컸다. 그래도 나는 퇴사해야 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한계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자꾸 참고 다니라는 가족 몰래 회사를 나왔다. 전부터 회사 그만둘 거라고 누누이 말씀드렸건만 소용없었다. 한국 실정을 잘 모르는 아내는 알아서 하라고만 했다. 그 대신 책임지라고.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한국 사정을 잘 알았다면 어찌 됐을지 모를 일이니.
남편이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면 아내의 반응은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갈린다. 내 아내처럼 ‘알아서 해. 그 대신 책임져’하는 유형이 있다. 남편 입장에서는 제일 무난한 타입이다. 그럼, ‘땡큐’다. 알아서 하면 되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제일 무서운 말일 수도 있다. ‘책임 안 지면 그땐 그냥….’(이란 말이 생략되어 있을 수 있으니까.) 아무튼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으로서는 허락해준 것만도 감지덕지다.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유형이 ‘그럼, 이혼해’하는 아내다. 무조건 반대다. 남편 입장은 들어보지도 않고, 결사반대다. ‘회사 그만두면 당신이 뭘 할 줄 아는데?’, ‘왜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 ’ 남자의 자존심을 팍팍 긁는 아내의 남편이 주로 사고 친다. ‘그래, 이혼해!’하고. 할 줄 아는 게 있을 수도 있다. 참을성이 없는 게 아니라 맞지 않는 일이라 그럴 수도 있다. 다음에는 ‘농담해?’하고 무시하는 유형이다. ‘바빠 죽겠는데, 농담하지 말고 회사 열심히 다녀!’ 아내의 한 마디에 남편은 ‘네~’하고 깨갱한다. 주로 아내가 집안을 책임지거나 혼자 고생 다 하는 경우가 그렇다. 마지막으로 ‘나, 당신 믿어. 힘내!’ 하는 유형이 있다. ‘오우!’ 말만 들어도 좋다. 이상형이다. 미국 이민 후 20년간 손대는 사업마다 실패한 세계 최대 도시락 업체 ‘스노 팍스’의 김승호 회장 회고다. ‘세 번째 사업에 실패를 인정하던 날, 나는 모퉁이 구석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귀를 막은 채 소리를 질렀다. 악~~~. 악~~~.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아내의 무릎에서 애처럼 울었다. 울고 있는 나에게 아내가 말했다. “여보, 괜찮아. 또 해 봐. 내가 식당 종업원이라도 해서 애들하고 먹고살면 돼.”’ 아내의 격려에 힘입어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나, 당신 믿어. 힘내!’하고 응원하는 아내를 만나려면 남편이 평소에 잘해야 한다. 평소에 믿음직스럽게 행동하고, 아내의 하고 싶은 일도 존중하고 응원해 줘야 한다. 아내가 반대하는 이유는 대게 합당하다. ‘나는 뭐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들 뒷바라지하는 줄 알아? 다 가족과 먹고살기 위해서 나도 나 하고 싶은 거 포기하고 사는 거야. 그런데, 남편이라는 작자는 철없이 자기 하고 싶은 일 한다고 가정은 나 몰라라 하고 회사를 때려치운다고? ‘에라 이 밥 팔아서 똥 사 먹을 인간아!’ 그러니 하고 싶은 일 하려고 퇴사해도 제 할 일은 해야 한다.
퇴사하더라도 ‘생활비’만큼은 목숨 걸고 갖다 주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실제로 대리운전을 해서라도 약속은 반드시 지키자. 나의 경우는 쉬운 길을 택했다. 대출이다. 퇴사하면 대출도 못 받으니 퇴사 전 회사 담보 신용 대출을 받아 월급 대신 주며 버텼다. 나처럼 쉽게 때울 생각 말자. 요즘 그놈에 대출 때문에 힘들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부터 꾸준히 저축하는 게 최선이다. 퇴사 대비 저축. 그동안 고생한 내가 나에게 주는 퇴직금이다. 가정 파탄 방지 자금이기도 하다. 아내는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으로 지금 생활수준을 유지하며 살고 싶어 한다. 남편이 회사 그만두면 생활비는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 말이 아니다. 이혼도 불사할지 모른다. 그러니 가정이 파탄 나기 전에 생활비를 모아 둬야 한다.
또 해야 할 일은 진정성을 보여주는 거다. 힘들어서 충동적으로 그만두는 게 아니라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퇴사하는 거라는 걸 보여 줘야 한다. 하고 싶은 일 할 생각에 푹 빠져서 계획하고 이것저것 해보고 밤새는 줄 모르고 몰입하는 모습을 본다면 아내도 부모도 마음이 변할 수 있다.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래, 그렇게까지 하고 싶다는 데 한 번 하게 해주자 할 수 있다. 연기라도 하자. 그만큼 절실하다는 걸 보여 주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그렇게 하고 싶은 일로 어떻게 먹고살 수 있는지 믿을 만한 방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최소 월급만큼은 갖다 줄 수 있겠구나, 하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끝내 반대할지 모른다. 아직 방책이 없다면 퇴사를 보류해야 한다. 내 생각엔 될 것 같은 데도 막상 닥쳐 보면 안 되는 게 현실인데, 방책도 없다면 더 고민해봐야 한다. 그러고 나서 퇴사해도 늦지 않다. 한계 상황이 아니라면.
부모님은 이해해주실 줄 알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자식이 행복해하는 모습 보면 부모님도 좋아하실 줄 알았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잘 사는 모습 보여드리면 인정해 주시리라 믿었다. 결국, 부모님도 두 번째 퇴사 뒤에는 잘해보라고 격려해 주셨다. 비록 아버님은 술 드시고 비틀거리긴 하셨지만. 부모님의 격려 한마디는 아직도 자신의 결정에 확신 못하는 아들에게 큰 힘이 된다. 믿음에 보답할 수 있게 잘해야지 하게 된다. 아내의 이해심도 퇴사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남편에게는 큰 위안이 된다. 아내의 이해심을 얻기 위해선 남편의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생활비만큼은 꼭 대줄게. 진짜 하고 싶은 일이야. 이 일로 돈 벌어서 회사 다닐 때 보다 더 잘 먹고 잘살게 해 줄게. 약속할게!’
남자, 퇴사해도 제 할 일은 다 하자. 그러면 가족이 응원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