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창경궁, 마음이 머무는 아침

매주 같은 시간, 같은 길을 걷는 사적인 순례

by papamoon

매주 주말 아침이면, 저는 집에서 가뿐하게 일어나 창경궁으로 향하곤 합니다. 집과 궁궐은 멀지 않고, 마음과 아침 햇살은 언제나 먼저 궁으로 달려갑니다. 개장 시각에 맞춰 걷는 그 길은 마치 나만의 작은 순례 같고, 문이 열리는 순간은 언제나 새롭게 마음을 여는 기쁨입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아직 닿지 않은 이른 궁궐은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조용하고 깊은 평화로 가득한 곳입니다. 정적 속을 두세 시간쯤 천천히 걷다 보면, 모든 풍경이 맑고 투명하게 다가옵니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반짝이고, 바람은 속삭이듯 스쳐 지나가며, 발끝에 머무는 흙냄새마저도 말 없는 대화를 건넵니다. 그렇게 창경궁은 매주 아침, 저에게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기쁨을 선물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완전하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 그 안에서 저는 내면의 숨결을 다시 듣고, 삶의 본디 리듬을 조용히 되찾습니다.


궁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곳은 춘당지입니다. 잔잔한 수면 위로 부서지는 아침빛, 수양버들이 물결에 살며시 입을 맞추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 같습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면, 저도 모르게 깊은 호흡을 하게 됩니다. 이 풍경 속에서 저는 자연의 일부가 되고, 세상의 중심이 어느 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립니다. 바람은 나무와 물, 햇살이 함께 빚어낸 생명의 언어 같고, 연못은 시간을 고요하게 담아내는 거울처럼 느껴집니다. 그곳에서 저는 다만 한 존재로서, 아무런 설명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됩니다.


이윽고 발걸음을 옮겨 유리온실로 향합니다. 원래는 유폐된 왕을 위로하기 위해 조성되었다는 이 온실은, 안타까운 시대의 그림자를 지니고 있으나 오늘의 저는 그 의미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곳에서 조용한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따뜻한 공기와 초록의 기운이 몸을 감싸며, 현실의 무게에서 부드럽게 이탈한 듯한 감각이 밀려옵니다. 식물 하나하나가 이름을 알지 못해도 괜찮다는 듯 자신만의 결로 조용히 살아 있고, 그 안에서 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받아들여지는 평온을 느낍니다. 온실이라는 이 투명한 경계 안에서, 오히려 제 안의 소리가 더 깊고 또렷하게 들립니다. 어떤 감정도 꾸미지 않아도 되는 이 공간에서, 저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잠시 머물게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이 되어줍니다.


온실을 나와 걷다 보면, 퉁명전 툇마루에 닿습니다. 오래된 나무 아래 앉아 있노라면, 바람이 조용히 얼굴을 스칩니다. 바람은 단순한 공기의 흐름이 아니라, 시간을 건너온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이 자리에 앉았던 옛 임금들이 바라보았을 풍경을 떠올려봅니다. 툇마루는 현재와 과거가 겹쳐지는 경계처럼 느껴지고, 그 경계에 조용히 앉아 있는 동안 저는 잠시나마 시간의 층위에 기대어 앉아 있는 듯한 감각을 느낍니다. 창경궁은 그런 시간의 결을 품은 채, 아무 말 없이 그저 고요하게 존재합니다. 그 안에서 저는 제 삶의 방향을 조심스럽게 가늠해 보게 됩니다.


창경궁은 본래 조선의 왕들이 어머니와 가족을 위해 정성을 다해 가꾼 ‘효의 궁궐’이었습니다. 성종은 세 분의 대비—정희왕후, 소혜왕후, 인수대비—를 위해 이 궁을 세웠고, 그 마음은 오랜 세월 궁궐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훗날 영조는 계비 정순왕후를 위해 자경전을 손보았고, 그곳은 오랫동안 그녀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어진 왕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누군가를 위한 배려와 그리움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 공간을 거닐다 보면, 저 역시 자연스레 마음이 닿는 곳이 있습니다. 늘 마음속에 있지만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부산에 계신 어머니을 향한 그리움과 죄송함이 이 아침의 고요함 속에서 조용히 떠오릅니다. 표현하지 않아도 이미 가닿아 있는 감정이 있고, 말 없이도 서로를 향하고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이곳에서 깨닫곤 합니다. 햇살도, 바람도, 나무도 그 마음을 아는 듯 잠자코 제 곁을 지켜줍니다. 그렇게 걷는 이 길은 어느새 나를 위한 산책이자, 멀리 있는 마음 하나를 향해 걷는 조용한 인사의 여정이 되어 있습니다.


창경궁에서의 산책은 저에게 단순한 여가의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 안을 들여다보고, 존재의 중심을 되짚어보는 조용한 여정입니다. 세상의 속도를 잠시 내려놓고, 비교를 내려두며,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연습. 저는 이곳에서 그 마음의 태도를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같은 길을 걸어도 매번 새로운 감정과 생각이 깃드는 이유는, 이 궁궐이 늘 제 안의 다른 풍경을 비추어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책은 결국, 삶을 천천히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이 조용한 아침들이 제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삶은 때로는 기다림이고, 멈춤이며, 아주 작은 반복 속에서 발견되는 진심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의 끝에는 언제나 사랑하는 누군가의 이름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저는 이곳을 거닐며 문득 떠올리곤 합니다.


다음 주말, 창경궁의 문이 다시 열릴 그 아침에도 저는 같은 길을 걸을 것입니다. 고요한 궁궐의 품 안에서 다시 숨을 고르고, 제 안의 왕국을 다스리는 법을, 조심스럽고 천천히 익혀볼 생각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취향, 가장 가치있는 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