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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뻔펀한 홍사장 May 16. 2024

버티거나 버튀거나

버틸 각오가 없다면, 차라리 튀어야 할까?

“어, 여보야~ 건너편 고깃집 벌써 닫았어.”
“벌써? 에구, 한가해서 일찍 접었나 보네.”
칼을 갈던 남편이 주방에서 잠깐 나와 창 밖을 빼꼼히 내다본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가게는 한산하다.
아직 개시를 못했지만, 밥시가 지나고 술시가 와야 바빠지는 우리가 조급해할 만한 시간은 아니다.
가게의 영업시간은 오후 5시부터 새벽 5시까지.
자정까지 개시를 못하고 있다가, 새벽 1시부터 하루 매상을 채운 적도 여러 번 있다.
그만큼 기약 없는 기다림이 다반사고,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들다.

가게 전산과 연동되어 있는 자영업자들만의 대화톡이 있다.
남편은 그 대화방을 한참 내려보다가 나에게도 읽어보라고 폰을 건넨다.
- 오늘 일찍 접습니다.  
- 날도 궂은데 집에서 술이나 마시려고요.
- 마지막 손님 나가면 튀려고요.
몇 달에 걸쳐 쌓이고 볼멘 사장님의 한숨들...

ⓒ뻔뻔

“진짜 코로나 때보다 더 힘들다더니 그런가 보네, 우리도 오늘 좀 일찍 들어갈까?”
“그래도 버텨보지도 않고 일찍 닫는 건 말이 안 되지.”
마감시간은 직장인의 퇴근시간과 같다는, 남편의 우직한 철학이 빛나는 순간이다.


빗줄기는 거세지고 손님은 아직이다.
마음은 어닝을 때리는 빗소리처럼 요란하고, 조급함이 바작바작 밀려오기 시작한다.
각자 하고픈 말이 있는 것을 알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부정적인 걱정의 말이 새어 나오려는 때는 이를 사리 문다.
“여보야, 아직 뻔시가 되지 않았잖아. 좀 더 기다려 보자고요.”
운명공동체끼리 다독이다 보면, 전우애는 더욱 돈독해진다.


잘 기다리고 잘 버티기 위해, 우리는 우리만의 단어를 만들어 두었다.

뻔시


우리 부부는, 뻔뻔한 포차만의 뻔뻔한 시간을 <뻔시>라고 부르기로 했다.
밥시가 지나야 술시(酒時)가 되고, 술시가 지나 손님이 오지 않아도 기다리면 반드시 우리의 시간의 온다고.

술시가 깊어졌다.

“사장님~ 오늘 왜 이렇게 한가해요?”
“아유, 옆집은 북적북적한데 여기는 왜 그래~”
띄엄띄엄 들어오시는 손님들마다, 인사 대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가게를 둘러보신다.
대신 마음 써 주시는 그 따뜻함이 항상 감사하다.

쭉 한가하다가 말도 안 되게 갑자기 만석이 되는 순간이 있다.
이때 들어오시는 손님은 완전 반대의 반응.
“여~ 이러다가 건물 사겠네.”
“이 동네 돈 싹쓸이하는 거 아니야?”
 
하..., 거 참.
당연히 속 모르시는 말씀들.
상황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지라, 우리는 하루에도 몇 회전 씩 손님의 걱정거리가 되었다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가 한다.


가게는 구도로의 사거리에 형성된, 작은 먹자골목의 애매한 위치자리 잡고 있다.
역과 역의 딱 중간. 어느 전철역에서 내려도 6~7분은 똑같이 걸어와야 하니, 소위 ‘목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코로나19 상황에서 가게의 목표는 하나였다.
<폐업하지 말자>.
점심 메뉴를 만들어 오전 장사도 해 보고, 배달앱에 등록해 배달도 시작했다.
시댁에서 제공해 주시는 쌀과 김치가 있으니 굶지는 않겠지 자위하며, 소상공인 특별대출을 받아 꼬박꼬박 월세를 내며 최소한으로 생활을 꾸려갔다.

남편은 1년 8개월의 영업제한 중에도 항상 마감시간을 채우고 들어왔다.
굳이 일손이 필요치 않으니 나는 집을 지키고 있었다. 알바라도 해 보려 했지만, 그렇게 되면 대출을 일시상환하게 되니 그 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하루 매출 0원. 한 팀도 들어오지 않았던 날도 위축되지 않고, 흰소리를 하지 않는 남편이 고마웠다.
“오늘은 두 팀이나 들어왔지 뭐야.”

 집순이가 돼버린 내가 무안하고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소주값이 오른다는 기사가 나가고도, 올려야 1년 이상을 고민했다.
이 작은 사거리에서도 하나둘씩 메뉴판 가격이 오르고, 누가 먼저 술값을 올리나 눈치게임을 하기도 했다.
아직도 소주값이 4천 원이냐고 빨리 올리라는 손님들의 채근이 쌓일 무렵에야, 겨우 메뉴판을 수정했다.
그렇게 버텨보자는 마음 하나로 시간은 흘렀고, 동굴인 줄 알았는데 지나 보니 터널이었다.


오늘의 글을 쓰다가 여러 편의 기사를 찾아본다.
- ‘자영업의 무덤’, 탈출구는 없나
- 대기업은 돈줄 죄기, 자영업은 줄폐업 위기
- ‘눈물의 자영업자’, 더 이상 빌릴 곳도 없다
- 고금리, 경기침체에 자영업 위기, 코로나 때보다 심각


코로나 때보다 더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곳곳마다 [임대]라고 써 붙여진 상가가 수두룩이다.
위기, 눈물, 폐업, 무덤... 자극적인 제목도 모자라니 이제는 아예 땅에 묻어버리는 건가.

영화 <파묘>의 험한 것보다 더 무서운, 험하디 험한 시기.


글감의 제목을 정하려니, 이미 작년에 <버티거나, 포기하거나>라는 제목의 PD수첩 방영분도 있었다(작가의 제목 잡기가 나와 비슷하여 깜놀?!).

*MBC PD수첩 예고편 캡처

불황과 식자재료 급등, 고금리 위기는 언제나 있어왔다.
안 된다, 죽는다 소리해도, 줄 서서 먹는 집은 여전히 웨이팅이 길고 유흥가는 북적인다.
십 년 전에도, 오 년 전에도, (코로나를 차치하고)일 년 전에도, 오늘도, 뉴스는 매일 불황이라고 떠들어댄다.
어중간하고 애매한 가게는 폐업과 창업을 반복하며 간판가게, 주방설비 사장님들의 입만 귀에 걸어준다.
양극화, 케바케, 경기침체... 잘 모르겠다.


이런 주제로 오늘의 글을 풀어나가려는 것이 아니다.
결국 나의 마음가짐, 이 가게를 지켜보고 사랑하는 나의 마음에 대해 쓰고 싶은 것이다.


직장인도 각자의 고뇌와 애환이 있겠지만,

자영업을 하다 보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현타를 느낄 때가 적지 않다. 아니, 거의 매일이다.
드라마 같은 낭만적인 성공스토리는 없다고 보는 것이 마음 편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손님이 오지 않을 것 같은 궂은날이 있다. 매출 그래프가 천국부터 지옥까지 널을 뛰는 날이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는 이유는 당연하다.
이곳이 나의 직장이기 때문이다.
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수단의 장이기 때문이다.
음식보다, 인테리어보다, 입지보다, 광고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함이 아닐까?
그 무엇보다 끝까지 해 보는 버팀이 아닐까?

自營業. Self-ownership.
말 그대로 <자영업>이니까.
잘하는지 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니고, 퇴근시간을 정해준 것도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스스로 꾸려나가야 하는 내 가게니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남편은 매일 숫돌에 칼을 간다.
기본기를 지키며 일상을 단단하게 해 주는 남편이 든든하다. 한가하다고 일찍 문 닫자는 남편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기다림의 시간에도 반드시 끝은 있다.
문이 열린다. 그대가 들어온다.
“어서 오세요~ 뻔뻔입니다.”
드디어, 뻔시가 되었다.
우리의 시간이 왔다.



*커버 이미지_ⓒ잡코리아×유튜브 공식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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