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아토피성 피부건조증이 있다. 손이 닿지 않는 등이 자주 가렵다고 해서 가게에는 두 개의 효자손이 걸려 있는데, 내가 있을 때는 꼭 직접 긁어달라고 한다. 가끔은 귀찮지만 사소한 섬김이 남편을 채워주는 사랑의 언어이니 얼마든지, 언제든지 마음을 담아 긁어주게 된다.
어느 날인가, 남편의 등을 긁어주고 있을 때 마침 손님이 들어오셨다. "아, 뭐야~ 애정행각은 집에서나 하라구요." 단골손님은 부러움 섞인 말투로 우리 부부를 놀렸고, 우리는 질투 나서 그러시는 거냐고 눙치며 웃었다.
간간이, 손님들의 가려운 구석을 긁어드려야 할 때도 있다. (이곳을 빌어-괄호 안의-마음의 소리도 적어본다.)
뭘 주문해야 맛있게 먹을지 추천해 달라고 할 때. (지금 만석이라 일일이 설명해 드릴 시간이...ㅠㅠ) 튀김옷을 안 입히고 새우튀김을 먹고 싶다고 할 때. (튀김옷을 안 입히고 새우를 튀길 수는 있어요. 그런데 수분이 날아가서 쪼그라들고 딱딱해지는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전골에 들어가는 우동사리를 반만 넣어달라고 할 때. (우동사리는 꽁꽁 언 냉동면이에요. 칼로 자르기 어려우니 반만 드시고 남기셔도 돼요.) 짬뽕 국물을 엽떡보다 맵게 만들어 달라고 할 때. (그렇게 해 드렸는데, 못 드시고 원망하는 손님을 너~어무 많이 봤어요.) 홍합어묵탕을 주문하시고는 홍합만 끓여달라고 할 때, 또는 홍합은 빼고 어묵만 끓여달라고 할 때. (오늘 홍합/어묵이 간당간당한데 우짜지...) 마요네즈가 들어가는 메뉴는 먹고 싶은데, 마요네즈 알러지가 있으니 어떡하면 좋겠냐고 할 때. (손님...?! 저야말로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까다로운 요구사항에주방은 난색을 표하지만,
남편이나 나나정말 안 되는 게 아니라면, 대부분의 주문은 맞춰드리려고 한다. 그게 마음이 편해서.
테이블이 좀 빠지고 한가해지면 남편과 얘기를 주고받는다. 이런이런 주문이 있었다고, 저런저런 주문을 만드느라 수고했다고. 이십 년 넘게 요식업에 종사했던 남편이 받은 가장 곤란한 주문은 바로 김치 없는 김치볶음밥이었다고 한다. 김치볶음밥의 맛은 먹고 싶은데, 씹히는 김치는 싫다나? 그래서 김칫국물로 간을 맞춰 어떻게든 내 드렸다고 하고, 손님은 맛.있.게. 드시고 가셨다는 해피엔딩.
홀을 담당하는 내가 유난히 잘하는 게 있는데, 단골들의 취향과 니즈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시원하게 긁어드리는 것이다.
창가자리를 좋아하시는 손님. 물티슈를 두 개씩 사용하시는 손님. 생맥주 잔에 소주를 따라 드시는 손님. 탕수육엔 꼭 소금후추를 찍어 드시는 손님. 기본 안주 번데기를 곱빼기로 좋아하시는 손님. 고춧가루와 청양고추를 한 종지씩 드려야 하는 손님.
저런, 오른손을 다치셨네, 포크도 같이 드려야겠다. 번데기를 안 드시는 손님께는 견과류를 챙겨드려야지. 저 손님은 생맥주 거품을 싫어하시니 조심해서 잘 따르기. 어린 자녀와 함께 오신 손님께는 집게와 가위를 갖다 드리고. 저분은 계란후라이 반숙, 저분은 완숙. 아, 저분은 반완숙이었지. 식사에 나오는 우동국물을 좋아하시는 손님께는 두 그릇을 챙겨드리는 걸로. 저 손님은 설탕토마토에 설탕을 많이. 그 옆 손님은 설탕 살짝, 아주 살짝만.
띵그렁~ 아, 이건 젓가락 한 개 떨어진 소리. 인터벌로 띵그렁 거렸으니 두 개 떨어진 소리. 조금 더 둔탁한 이 소리는 숟가락이 떨어진 소리. 손님이 나를 부르기도 전에 딱 맞게 갖다 드릴 때 자주 듣는 소리는, "와~ 사장님 소머즈예요?".
가끔은 눈치와 센스라는 효자손도 사용한다.
"누나, 진짜 오랜만에 왔죠? 저 작년 말에 여친과 헤어졌어요." 이모보다 누나가 낫지 않냐며 서글서글한 미소로 친근하게 대해주시던 손님께는, 부담되지 않을 만큼의 위로로 토닥여 드린다.
'앗~ 저분은 (또!) 남친/여친이 바뀌셨네.' "드시던 걸로 드리면 되죠?"라고 평소처럼 살가운 인사를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빛의 속도로 파악해야 한다. 업무상 고객비밀유지의무는 바로 이곳, 뻔뻔에서도 잘 지켜지고 있다.
때로는 효자손이 아니라, 효자노릇도 하게 된다.
가게 입구에는 양 옆으로 앉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는데, 평일/주말 가릴 것 없이 오후 5시면, 어김없이 쉬었다 가시는 할아버님이 계시다. 혹여 지나가지 않으시면 오늘은 안 오시나 궁금하기도 하고 때론 걱정도 될 정도. 돌돌이를 끌고 지친 다리를 의자에서 잠시 풀고 가시는 분들. 우리 가게 앞에서 장바구니가 찢어져 당황하신 어머님께는 비닐을 챙겨 드리기도 하고. 지나가다 물만 한 잔 청하는 분께도 흔쾌히 갖다 드린다. "저, 화장실만 좀 사용해도 될까요?", 오브 콜스~ (근데 그때 그 아저씨! 두루마리 휴지는 왜 통째로 가져가셨나욧?)
어쩌면 작고 사소한 행동이지만, 손님이 필요를 요청하기 전에 눈치껏 챙겨드리는 행동에 혼자 뿌듯함을 느끼는 편이다. (알아주지 않으셔도 괜찮고, 알아주시면 더 힘 나고.)
번화가도 아니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작은 주점이지만, 이곳을 방문하시는 분들이 맛있게 드셨다고 하시며,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가시는 것이 우리 부부의 가장 큰 보람.
만 원짜리 메뉴라고, 만 원만큼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내가 노노. 호텔 라운지 같은 편의를 제공해 드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기분 좋은 미소와 적절한 태도로 손님의 마음을 사로잡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