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놓인 휴대폰 넷플릭스 화면이 술친구인 것 같다. 어떤 프로그램을 보는지는 모르지만, 이어폰을 끼고 오래도록 집중하면서도 면치기는 수준급이다.
혼자 먹기에는 꽤 많은 양인데 저녁을 챙기지 못하는 걸까, 항상 찬찬히 다 먹고 간다.
후룩 후루룩. “사장님, 우동 사리 한 개 추가해 주세요.” 오늘은 많이 시장했던 걸까?
꽤 마른 체구인 그녀가 먹기에는 많은 양이다. 체구와 식사량의 상관관계는 나의 선입견이겠지?
ㅡ“우동사리 넣어 드릴게요.”
주방에서 받은 사리를 서둘러 짬뽕냄비에 채워드린다.
가게에서 그녀를 맞이한 것은 벌써 작년 말부터 쭈욱.
이젠 이곳이 편하게 느껴지는지 그녀가 입을 뗀다.
“저 많이 먹죠? 오늘 첫 끼에요.”
그럼 그렇지. 그녀는 허기졌다. 오늘의 그녀는 많이 수고했던 모양이다.
“요즘 알바를 하는데, 일이 잘 안 풀리네요.”
알바만 하다가 삼십 대를 맞이할 것 같은 두려움이 가득하다고 했다.
이십 대 후반이라니, 꽤 동안이셨구나. 다른 손님은 없던 시간이라 우리는 꽤 오래 대화를 나눴다.
예체능 과라서 부모님이 희생을 많이 하신 게 너무 죄송하고, 전공은 살리고 싶은데 수요가 적다고. 아무 데라도 정규직에 취직을 해야 하나 싶어서 고민이 많다는 마음을 나눠주었다.
손님과의 대화에서 나는 주로 청취자.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닌 이상, 섣부른 조언을 하게 될까 봐 조심스럽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영화 제목과 비슷하게, 그때도 틀렸는데 지금도 틀리는 나를,수도 없이 발견하기 때문에, 2개인 귀는 열되 1개인 입은 잘 다물고 있기로 한다.
40대의 끄트머리를 살아가고 있어도, 여전히 틀리고 부족하고 모르는 것 투성이기 때문에.
그때는 맞더라도 지금은 틀리는 게 너무 많다. 나이가 몇이더라도, 옳은 방향으로 달라지는 건 받아들이고 또 배우자. 그게 ‘탈 꼰대’의 지름길이다.*
마침 내 가방에, 그녀에게 전해주고 싶은 물건이 있음이 떠올랐다.
밀리의 서재 팝업스토어에 방문했을 때, 신간 기념으로 배부해 주었던 책갈피들.
ⓒ뻔뻔
Scene no.2
그는 항상 말쑥한 수트 차림이다. 방문 시간은 늘 자정이 넘은 깊은 밤.
언제나 유린기와 연태고량주 중간 사이즈 한 병이다. 고량주는 소주잔이 아니라 맥주잔에 마신다. 아주 천.천.히. 유린기도 음미하며.
기본 안주는 다 물린다. 챙겨드릴 게 없어서 믹스견과를 내어드리기 시작했는데, 건포도만 남는다. 그다음부터는, 바쁘지만 않으면 건포도를 일일이 빼고 드린다(내 섬세함을 눈치채셨으려나?).
그를 만난 건 장미 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한 늦은 봄부터. 간헐적이지만 꾸준히 오시는 그를 보면서, 술을 천천히 즐기며 마신다는 것이 저런 모습일까 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며칠 전, 그가 물었다.
“혹시, 디파짓(deposit)이 가능할까요?”
응, 으응? 나는 남편을 바라봤다.
“아, 한 백만 원 정도 선결제할 수 있을까 해서요. 저희 부서 직원들이 오면 돈 받지 마시라고요.”
‘아, 그 디파짓!’
아니 선결제를 해 드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 작은 주점에서도 이런 일이 생기긴 하는구나.
ㅡ“네, 원하실 때 결제하시면, 저희가 알아서 잘 차감할게요.”
그는 늘 그렇듯 취기 없이 깔끔하게 연태 한 병을 다 비우고 갔고, 우리 부부의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ㅡ“뭐야 뭐야, 여보야 어떻게..., 받아요 말아요?”
선수금을 받게 되면 음식을 저당 잡히는 기분이라 굳이 받고 싶지 않다는 남편과, 이 가게에서 이런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은데, 기분이라도 좋게 이번 달 매출에 백 단위 하나 더 찍고 싶다는 나의 의견이 옥신각신.
디파짓, 그까짓.
결국, 손님이 원하시면 받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뭐 하는 분일까, 직업은 뭘까, 무슨 회사일까, 궁금한 것 투성이지만 다시 오시기만을 고대한다.
손님~ 저도 디파짓이란 거, 한 번 받아보고 싶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Scene no.3
# 그의 이야기
그녀는 매주 수요일마다 찾아왔다. 작년부턴가? 이젠 꽤 오래된 단골이다.
주문은 항상 안주 하나에 생맥주 한 잔, 많아야 두 잔. 술은 잘 못하는 것 같다.
메뉴 도장깨기라도 하듯, 매주 다른 메뉴를 돌아가면서 시킨다. 음식은 입에 맞으시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녀가 오는 시간은, 언제나 <수요미식회>라는 프로그램이 나오는 시간이었다.
한가할 때마다 수요미식회를 같이 시청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이 붙었고, 어느새 그녀와 나는 말벗이 되었다.
어느 날인가, 그녀는 닭똥집볶음을 시켰다. 옆 테이블에서 어머니 뻘의 손님들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그거 뭐야? 맛있게 생겼네.”
ㅡ“아, 이거 닭똥집이요. 저 혼자 먹기 많은데좀 드셔보실래요?”
그녀는 앞접시에 안주를 조금 덜어 어머님들에게 건넨다.
“아유, 고마워. 우리가 맥주 한 잔 살게. 사장님~ 여기 아가씨한테 생맥 한 잔 주고 우리한테 달아.”
그녀는 크게 마다않고 생맥주를 받아 마셨고, 이어 어머님들의 질문공세가 시작되었다.
왜 혼자 마셔, 남자친구는 없어, 나이는 어떻게 되구, 결혼은 안 할 거야... 예의 그 참견들로 그녀는 미소를 점점 잃어가는 표정이었고, 어머님들 덕.분.에. 나는 그녀의 대략적인 나이를 파악할 수 있었다.
# 그녀의 이야기
“이것 좀 드셔보세요.”
그가 내민 앞접시에는 통실한 크림새우 두 마리가 누워있었다.
‘뭐지, 서비스인가?’
요즘 들어 그가 소소하게 챙겨주는 서비스가 늘어간다.
<수요미식회>를 함께 보며 수다를 떨다 보니 내적 친밀감이라도 느낀 거야 뭐야.
오늘따라 어머니 뻘 손님들의 참견이 선을 넘었다. 얼른 먹고 일어나야지, 좀 지친다.
음식맛도 훌륭하고 혼술이 편한 곳이라 단골이 되었는데, 옮겨야 할 시점이 왔나 보다.
“저, 여기 앉아도 되죠?”
그는 생맥주 한 잔을 따라 내 앞에 앉으며, 참견의 일행들을 살짝 차단해 주었다.
ㅡ“네, 사장님도 한 잔 하세요.”
다음날은 휴무. 시간은 넉넉하고, 밤은 아직 길다.
충분히 먹고 마시고, 푹 늦잠을 자도 될 소확행만 남았다.
“사귀는 사람 있어요?”
ㅡ“아니요, 없는데요. 사귈 생각 없어요.”
“에이~ 왜요. 좋은 사람 있으면 만나볼 수도 있죠.”
ㅡ“제가 결혼 생각이 없어서요.”
“아, 그래요? 그래도 한 번 만나봐요. 혹시, 저는 어때요?”
어라? 이 남자 보소?
그의 친구들이 손님으로 왔을 때,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나이로 짐작했는데.
내가 훨씬 누나다 하면, 당돌한 질문은 금방 접겠지.
ㅡ“사장님보다 제가 나이 더 많은 건 알고 계세요?”
“저 어떠냐고 물었지, 몇 살이냐고 물어본 거 아닌데요?”
어, 신선한데? 참신하게 받아친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세다.
..........
이듬해 우린 코로나19를 뚫고 결혼식을 올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앞치마를 입고 서빙을 하고 있었다.
이 문구에 홀려서 가게문을 열었더랬지_ⓒ뻔뻔
사람들은 누구나 내게 행운과 불운을 함께 선사했다. 행운만을 안겨준 사람도, 불운만 겪게 한 사람도 없다. 늘 행운과 불운, 두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났다.**
정말 이 말이 맞다.
동전의 양면처럼, 때로는 행복과 위안으로, 때로는 고통과 절망으로 다가온 사람들.
같은 사람의 동시다발적인 모습에 실망과 아픔도 느끼지만, 그만큼 또 내 그릇이 깨어지면서 커지고, 내가 성장하는 동력이 된다.
삶의 갈림길마다 만난 사람들을 통해 때로 방향을 틀고, 때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은 깨달음을 얻고, 때로는 잠시잠깐의 위안이 되어 주는, 그런 사람들 모두가 내 인생을 조금씩은 바꿔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꿈에도 만나고 싶지 않은 그놈과 사귀어보니 남자 보는 눈이 달라지고, 꿈에 나와서 잠이 확 달아나 버리는 그 상사와 일 해보니 직장 고르는 안목이 키워지고, 정말 사람이 그립고 필요한 순간에 손잡아 준 그 언니와 얘기해보니 나도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따스함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 것이다.
혼술로 시작해서 부부의 인연을 맺은 것도 신기. ‘주점에서 일하는’ 내가 되어 손님들과 고민을 나누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신기. 모든 Scene이 시절에 맞는 인연으로 이어져 한 편의 극이 되어 간다.
첫 Scene의 취준생 손님께 건넨 책갈피의 문구들이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가 닿길.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순간에 허기가 느껴진다면, 여기 뻔뻔에서 얼큰한 짬뽕이라도 드시며 만복(滿腹)의 기쁨이나마 채워 가시길. 우동사리는 서비스로드리자.
길목 길목에서 만난 짧은 인연들을 소중히 여기고, 분별할 줄 아는 지혜의 눈을 갖고 싶다.
누군가에게 결정적인 한 사람이 되어줄 자신은 없지만, 필요하다면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밥 먹었니, 밥이나 먹자,하며 마음의 허기를 조금이나마 채워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