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이래서 백수가 과로사로 죽는겨

내 뇌에게 걱정대신 할 일을 주었다.

by papeltina

퇴사 88일 전.

지금부터 자유롭게 3일 정도만 휴가를 쓴다고 가정할 때, 남은 휴가를 탈탈 털면 나는 12월 8일 오후 5시부터는 백수가 된다. 그 사실을 매일아침 디데이 어플로 스스로에게 상기를 시켜주고 있는데... 의외로 큰 기쁨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덴마트다이어트나 GM다이어트를 할 때처럼, 기간은 정해져 있지만, 현재의 지루함과 고달픔으로 줄어드는 속도가 체감되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어제, 프랑스의 유일한 절친 나제트에게 연락이 왔다. 요즘 육아휴직 중인 그녀는 나의 퇴사 소식에 함께 기뻐해주며, 프랑스 실업급여 제도를 알려줬다. 1년간 나의 다음 직업을 탐색하는 것에 프랑스가 동의해 주는 뜻이란다. 그녀는 나와 같은 전공이지만 늘 이렇게 마음을 건드릴줄 아는 예쁜 단어들을 사용한다. 그녀가 대신 전해 주는 어느 한 나라의 '동의'란 말이 나의 선택을 지지해 주는 것 같아 위로가 됐다.


그녀의 고마운 전화로, 걱정하던 퇴직이후의 기본적인 생활문제가 해결됐음을 인지하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잠잠하던 걱정이들이 우다다 몰려왔다.


'쉬고 난 다음은?', '뭐 하면서 쉴 건데?', '지금 쉬면, 앞으로 계속 쉬어야 할지도 몰라'.


그동안 하고 싶은 이 많은 말들이 어떻게 다 '뇌'라는 좁은 공간에 보관되어 있었을까 싶었다. 뇌는 무한대의 영역이란 가설이 맞는 듯하다. 퇴사를 앞두고 자꾸만 과학적 실체를 하나 둘 깨닫게 된다.


걱정이들이 난동을 부린다 한들, 당장 뭘 시작하기엔 아직 퇴사도 하지 못한 상태라 마음의 에너지도 없고, 몇 년을 자판으로, 파이펫으로, 딸깍 대는 손가락 운동만 해댔으니 체력도 저질이다. 이놈의 부정적인 걱정들을 멈춰보려 머리를 굴려보지만, 요 몇 년 깨달은 바로는 이럴 땐 자본주의가 준 편리성, '현질'이 답이다. 돈으로 피할 수 없는 더 큰 근심을 만들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소소한 걱정들을 혼내 주는 것이다. 옛말에 이이제이; 오랑캐는 오랑캐로 다스린다는 말이 있다. 이를 응용해, 이우제우; 현질로 근심을 만들어 근심을 다스리기로 했다. 이렇게 저렇게 어렵게 말해보려고 하나, 결국 지금 걱정보다 더 급하고 어려운 일을 만들어 뇌가 딴생각을 못하게 하는것 정도랄까.


나는 인터넷을 켜고 무작정 토플시험을 결제했다. 영어 점수는 따 놓으면 2년간 나의 이력서 한 줄에 든든히 자리 해주기 때문에 지속효과를 보고 한 선택이었다. 해외에서 계속 살아낼지, 한국으로 돌아갈지 모르기 때문에 인정범위가 그나마 넓은 영어시험으로 골랐다. 내 나름의 퇴사 이후의 빈약한 대비책이었다. 토플 시험비는 막냇동생의 말처럼 2번만 보면 여느 게임기 한대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고, 시험일은 가장 가까운 날로 정했다. 바로 다음 달이었다. 나의 이 소중한 돈이 허투루 쓴 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시험이 있는 한 달간은 뇌의 전 부위를 다 끌어 써야 할 것이다.


좋았어!

지난 6개월간 퇴사 준비를 하며 논문준비로, 인수인계 준비까지 하느라, 주말의 일부분까지 사용하며 모든 나의 저질 체력을 갖다 썼던 일이 끝나자마자 일을 또 벌인게 됐다. 사실 몸도 맘도 지쳤지만 괜찮다. 아니 오히려 더 효과는 극대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시험기간 한정 발휘되는 이 '쥐어짜' 효과는 이미 한국에서 충분히 검증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성공할 것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88일 중 30일 동안 소란스러운 뇌를 진정시키는 것에 성공할 것이다.


내친김에 집 근처 헬스장 PT도 끊어 몸도 좀 더 피곤하게 하려 했건만.. 시험비 결제에 PT 비용까지는 좀 무리겠다 싶었다. 내가 나를 혼내는 비용이라고 하기엔 당장 다음 달 월급이 날 혼낼 것 같았다.


한국에 있는 20년지기 친구에게 퇴근길에 요즘 근황을 전하자,

"한국인은 이래서 백수가 과로사로 죽는겨.

아무리 외국 살아도, 천상 니도 한국인이여"

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일이 힘들고 좀 쉬고 싶어 퇴직을 선택했건만, 쉬고 싶어 시험까지 결제해 가며 일을 만들다니.

친구의 말에 공감이 되어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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