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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r 29. 2024

순한커플, 한 편의 시

  “시 썼어?”라고 급한덕에게 물었더니

  “씻었냐고?”

  엉뚱하게 되묻는 급한덕. 


  시보다 훨씬 어려운 '브로콜리'나 '블루베리' 같은 단어들은 알면서 '시'라고 하면 매번 못 알아듣다가 '글'이라고 해야 겨우 아아... 한다. 


  시. 한 단어. 받침도 없고 발음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시'는 낯설고 먼 단어다. 칠십이 넘은 순한커플에게는 더욱 그렇다. 요괴딸의 사전에도 시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던 단어였다. 급한덕과 똑순애와 함께 살게 되면서 둘의 말과 대화가 신선하고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때그때 둘의 대화를 일기처럼 기록해 두기 시작했는데 다시 읽어보면 그게 꼭 무언가로 느껴졌다. 회복하고 싶은 무엇. 무엇이 시라고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급한덕. 똑순애가 한 편의 시로 다가왔다. 그렇게 존재를 시로 인식하고 나니 시가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았다. 급한덕과 똑순애가 시를 써보면 어떨까. 과연 가능할까 궁금해졌고 일단 해보자는 마음을 실천했다.     

  

  오늘은 자유 소재로 시를 썼다. 시 쓰기에 앞서 1. 낱말 읽고 쓰기 2. 이상교 시인의 시 읽기와 필사하기를 진행했다. 8칸 노트에는 토끼, 붕어빵 같은 단어로 채운 두 페이지. 줄 노트에는 짧은 시 두 편을 적어 주었다. 낱말을 읽고 쓰면서 자연스레 언어 감각도 키우고 시의 감각을 자연스레 체득하는 것. 무엇보다 시를 읽는 게 즐겁다는 것을 느꼈으면 했다. 

  

  급한덕은 낱말과 시를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낱자를 더듬더듬 틀리게 읽어가는 동안, 똑순애는 즐거워하며 연신 웃었다. 급한덕이 시를 읽을 때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똑순애는 급한덕을 놀리고 싶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장난꾸러기 같다. 

  

   똑순애는 술술술 읽었다. '했습니다'인데 '했어요'로 종결어미를 마음대로 바꿔버리거나 낱말의 첫 글자만 보고 떠오르는 대로 읽어버리기도 했다. 읽기는 급한덕 보다 똑순애가 훨씬 급했다. 

  

   읽은 시를 필사하는 시간. 급한덕은 연을 나누는 빈 공간을 보며 왜 여기에는 아무것도 안 썼냐며 궁금해했다. 요괴딸은 명확하게 답을 하지 못했다. 이것이 과제임을 알았다. 설명으로 이해시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체득하길 바랐다. 

  

  흐름. 호흡. 노래. 세 단어가 머리에서 빙빙 돌았지만 정리해서 말하지 못했다. 행과 연의 사전적 설명이라도 해 줌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설명 이전에 시를 꾸준히 접하면서 그냥 저절로 하게 되길 바란다면 너무 안일한 태도일까. 기다려보고 싶다. 시를 읽고 쓰면서 자신도 모르게 행과 연을 구분하기를. 과연 그런 날이 올까. 그때까지 시를 쓸 수 있을까. 

  

  낱말 읽고 쓰기, 시 읽고 쓰기를 한 다음에는 팔을 흔들며 몸을 가볍게 풀었다. 요런 건 둘 다 신나게 잘 따라 한다. 20초 정도 눈을 감고 호흡만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 후 자유 소재로 시를 쓰라고 주문했다. 


  급한덕은 절망하듯 머리를 바닥에 붙였다. 똑순애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창작의 고통을 이미 알아버린 걸까.) 급한덕은 쓸 거리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들고 한 자 한 자 천천히 소리 내며 써나가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다녀온 똑순애는 급한덕의 시 쓰는 모습을 보더니 몸을 굽히고 물고기 뽕긋뽕긋을 시작한다. 


  “나비가 훨훨 날아~” 똑순애는 어디에도 없는 음률의 노래를 부른다. 요괴딸은 예감한다. '나비'에 대해 썼겠구나. 오늘도 똑순애가 시 쓰기를 먼저 마쳤다. 두 줄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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