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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r 22. 2024

제목은 없고 재목만 있는 시

둘이서도 잘해요

  "오늘은 둘이서 써 보세요."


  오후 2시경, 요괴 딸은 운동 나갈 준비를 마친 뒤, 순한커플에게 종이와 연필을 건넸다. 순한커플끼리만 시를 쓰면 어떨까 궁금했다. 똑순애는 몸 컨디션이 안 좋아서 못 쓰겠다고 했다. 똑순애는 소론도(스테로이드)를 끊은 후로 많이 힘들어 한다. 시 쓰기는 못 하더라도 똑순애에게 임무 하나를 주고 싶었다. 


  "급한덕이 시를 쓰면 제목을 쓸 수 있게 똑순애가 도와줘요."

  똑순애는 임무를 반드시 완수하겠다는 의지에 찬 눈빛으로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운동 내내 과연 급한덕은 시를 썼을까. 똑순애는 제목 쓰기 돕기 임무를 완수했을까. 궁금했다. 두 시간 여가 지나 집에 돌아왔더니 둘 다 안 썼다고 고개를 흔든다. 요괴딸이 실망하는 빛을 비추고 방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문갑 열어 봐."

  급한덕이 쓴 시 한 장만 들어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종이 두 장에 급한덕 글씨가 쓰여 있었다. 급한덕이 두 편의 시를 쓴 모양이었다. 


  저런....

  똑순애는 임무 완수를 하긴 했으나, 시의 제목이 있어야 할 자리에 복사해서 붙여넣기 한 듯 '재목' , '재목'이라고 쓰여 있었다. 정작 시의 제목은 없고, 재목만 있었다. 급한덕은 똑순애가 재목을 쓰라고 시키니까 쓰긴 했는데, 글자에서도 혼란스러운 기운이 꾸물꾸물 기어나왔다. 


  가게 간판을 설명하면서 제목은 글의 간판 같은 거라고 설명했다. 급한덕은 듣는 둥 마는 둥 "제목이 무슨 필요야." 하는 표정이다. 


  다른 시들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제목을 붙이게 될 날이 오겠지. 


  시 두 편 다 급한덕이 썼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글씨 좀 쓰는 애가 연애편지 대필하듯 똑순애는 시의 내용을 급한덕에게 불러주고 급한덕이 받아서 써준 거였다. 아픈 와중에도 시를 생각해 낸 똑순애가 기특했다. 


똑똑 참새     ㅣ똑순애 


운동길 가다 참새를 만났는데

서있는 강아지 풀을 폴짝 뛰어

확 밟아서 눕혀 놓고

강아지 풀씨를 쪼사 먹고 있었다


참새가 참 똑똑한 걸 보았다 


  요괴딸은 똑순애의 시를 읽다가 질문을 했다. 

  "참새가 강아지 풀을 먹어?"

  똑순애 시의 내용을 물어보자 똑순애는 아주 신이 났다. 참새가 강아지 풀씨를 어떻게 먹는지 손으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기운 없던 똑순애 목소리와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요괴딸이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급한덕은 "똑순애가 이번 시 잘 썼어. 잘 됐어." 나서서 칭찬했다. 제목이 '재목'인 급한덕의 시에 똑순애는 '눈이 빛나는 비둘기'라고 제목을 붙여주기도 했다. 


  "비둘기는 눈이 정말 번쩍번쩍해." 똑순애는 비둘기 마냥 몇 번이나 눈을 부릅뜨며 비둘기 흉내를 낸다. 귀여운 똑순애. 급한덕은 똑순애가 붙여준 제목이 내키지 않는지 잠시 고민하더니 '비둘기는 깨를 좋아하는 줄 압니다'로 하겠단다. 


비둘기는 깨를 좋아하는 줄 압니다    ㅣ급한덕


깨를 갈아서 그물을 덮었는데 이틀 후 가서 보니 그물 속에 비둘기가 다섯말이나 들어있어 깜짝 놀랬음니다 

그 뒤에 한 달이 지나도 깨가 한 개도 안 올라와서 정말 놀랐습니다 


  급한덕은 시의 흐름을 신경 썼고 독자를 의식하는 말도 넌지시 던진다. 

  "이렇게만 써 놓으면 사람들이 알라나? 내용을 더 써야 할 것 같은데..."

  요괴딸이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하니 그제야 흡족해하며 웃는다. 순한커플은 무엇으로 시를 쓸지 소재를 떠올리는 것은 흥미로워했다. 다만, 생각을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글자를 몰라 답답해 했다. 맞춤법을 제대로 쓸 수 있다면 생각을 막힘없이 표현할 수 있겠다 싶었다. 순간 '시 필사하기'가 떠올랐다. 


  시를 필사하면 다양한 시를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맞춤법도 고칠 수 있고, 제목이며 행과 연의 구분도 체득할 수 있다. 


  "고라니는 내가 좀 알지." 급한덕은 다음에는 고라니를 소재로 써보고 싶다며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순한커플의 두 번째 시는 '관찰'을 통해 나왔다. 강아지 풀씨 먹는 참새와 깨를 좋아하는 비둘기라니. 


 순한커플 둘 다 시인될 재목이다. 아니, 이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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