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라니 Mar 08. 2024

순한커플 어린이들

급한덕은 더듬더듬 똑순애는 뽕긋뽕긋

  순한커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고 연필을 쥔다. 엎드려 글쓰기 모드에 돌입. 눈 내리는 풍경처럼 고요해지더니 스걱스걱 연필소리만 난다. 더듬더듬 한 글자 한 글자를 기억해 내며 시를 써 내려가는 급한덕. 물고기처럼 입을 뽕긋뽕긋 퐁퐁 물방울 터뜨리는 소리를 내며 쓰는 똑순애. 


  10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똑순애가 먼저 시 쓰기를 마쳤다. 시를 마무리할 때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으며 시를 써 내려가는 급한덕의 모습이 놀라웠다. "시시시작!"을 외쳤을 뿐인데 정말로 순한커플의 생애 첫 시가 탄생했다. 마법 같았다.  


눈     ㅣ 똑순애


눈이 하얗게

소북소북 왔는데 금세 녹아 버렸어. 

그런데 해가 벌-겋게 떴어.


눈이 내리는 날이면 생각나는 사람     ㅣ 급한덕


어머님 아버님 생각이 많이 나고 없어진 동생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옛날 눈썰매 타던 생각이 납니다. 눈은 정말 마음이 상캐하고 정말 좋은 눈일 줄 알고 있습니다.


  똑순에는 읽는 속도는 빠르지만 쓰기에는 서툴렀다. 반면, 급한덕은 읽는 건 느려도 대략 무슨 내용인지 알아볼 수 있게는 썼다. 틀리게 쓴 낱자를 보고 단어를 추리하고 문장으로 조립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똑순애는 생각나는 대로 적지 못해 애를 먹은 모양이다. 쑥 꺼져 있다가 요괴딸이 맞춤법을 알려주자 바로 의욕적으로 변했다. 아... 똑순애는 맞춤법에 맞게 쓰는 것에 관심이 많구나. 흥미로웠던 것은 똑순애의 시는 짧았지만 본능적으로 행과 연의 구분을 하고 있었다. 


  시 쓰기를 마치고 자신이 쓴 시를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급한덕은 똑순애의 낭독에 집중하지 않고 본인 시를 읽어보느라 바빴다. (급한덕은 말 잘 안 듣는 학생이었음이 분명하다) 서로의 시를 듣고 좋았던 부분을 칭찬하자 했더니 둘 다  "다 잘 썼어. 다 잘 됐어." 뭉뚱그려 말해버린다. 구체적으로 칭찬하는 법을 알려주고 해 보라니 시 쓰는 시간보다 더 오래 걸렸다. 


  진짜 시 수업처럼 해보려고 급한덕 어린이, 똑순애 어린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최대한 존댓말을 쓰려고 의식했다. 다음 수업시간에는 '새'나 '쥐'를 소재로 시를 써보자고 미리 알려주었다. 소재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면 시를 쓰는 부담이 덜어질 것 같아서였다. 


  수업 시작부터 녹음을 했고 녹음 파일을 처음부터 들어보니  "깜짝 놀랐다." , "너무 잘 썼다." 요괴딸의 오버 리액션이 거슬렸다. 요괴딸이 순한커플에게 요청했던 '구체적 칭찬'은 없고, 과잉된 칭찬만 난무했다. 칭찬을 푸짐하게 해 줘야 시를 쓸 거라는 생각이 깔려있었던 듯하다. 수업 진행할 때는 몰랐는데 우리는 깔깔대며 많이 웃고 있었다. 특히, 똑순애가 시 쓰는 급한덕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읽혔다. 


  "으헤헤헤. 많이 썼네. 방한덕이. 

  (애교스럽게) 나는 못 썼쪄.

  글이 안 나와. 방한덕 시 잘 쓰네. 

  나는 눈도 안 보이네. 으헤헤헤."


  개구쟁이처럼 깔깔대며 해맑게 웃는 똑순애. 어린이 똑순애가 꼭 저렇게 웃었을 것 같다. 똑순애의 웃음에 급한덕도 따라 웃는다. 웃는 것도 역시 급하군. 수업을 마무리하기 전에 한 편을 돌아가며 한 행 씩 낭독했다.


  눈 내리는 밤 ㅣ강소천


  말 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누나도 잠이 들고

  엄마도 잠이 들고


   말 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나는 나하고 

  이야기하고 싶다.



  '눈 내리는 밤'을 다 읽고 나니, 급한덕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한다. 

  "내가 나하고 어떻게 얘기를 해? 

  (잠시 고민) 음... 나는 개 하고 이야기하고 싶다."

  

  똑순애와 요괴딸은 어이없어하며 웃는다.  어릴 적 고무줄, 잡기 놀이, 줄넘기 등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친구들과 박자를 맞춰 놀이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던 외침이 있었다. 


   시를 시작한 오늘, 요괴딸의 주문이 순한커플에게 통했다. 노랑 연필 쥐고 쓰는 급한덕, 초록 연필 쥐쓰는 똑순애.   


  "시시시작!"  






이전 02화 순한커플 생애 첫 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