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한커플의 일상에도 서서히 시가 스며든다. 똑순애는 삼월 삼짇날이면 제비가 나온다며, 그때는 제비로 시를 쓰겠다고 한다. '나온다.'는 표현이 싱그럽다. 봄이라는 무대에 제비가 꼬리를 살랑이며 새초롬하게 등장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똑순애는 '바람이 일어난다'라고 말한다. 잠자던 바람이 쓰윽 일어나 여기저기 신나게 쏘다니는 게 상상된다. 급한덕은 싹이 튼다. 싹이 난다. 대신 "싹이 올론다.(올라온다)"라고 말한다. 땅 속에 있던 싹이 땅을 뚫고 위로 쑥 올라오는 모습이 그려진다. 자연 밀착형. 상상력 상승 언어를 구사하는 순한커플의 말 자체가 시다.
단어 앞에 봄이 붙으면, 한층 더 밝아지고, 따뜻해지고 생기가 돈다. 봄비, 봄볕, 봄날, 봄소풍, 봄나들이, 봄꽃, 봄소식, 봄바람, 봄옷, 봄학기, 봄나물...
새로 시작하는 설레고 풋풋한 마음이 '봄'에 들어있다. 봄은 언제나 곁을 내준다. 어디든 가도 좋다고, 괜찮다고 응원과 지지를 보내준다. 봄비는 겨우내 얼었던 땅을 촉촉하게 적시고, 연두 이파리와 분홍 꽃망울을 터뜨린다. 포근한 봄기운은 사랑이다. 봄의 아낌없는 사랑을 우리는 그저 받기만 하면 된다. 봄봄봄. 봄은 여기저기서 돋아나 더욱 돋보인다. 감나무 새순이 돋고 잎이 넓어질 때, 대추나무 가지 마디마디에서 쭈뼛쭈뼛 연두 잎이 기지개를 켠다. 가시 돋친 개두릅나무에도 순하디 순한 연두가 달랑인다. 잘 보면 같은 연두가 없다.
봄의 작고 귀여운 연두 이파리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귀여운 방울소리가 날 것만 같다. 바둑이가 꼬리를 흔들며 쫄래쫄래 따라올 때 나는 그 방울소리와 비슷한. 봄에는 시각뿐 아니라 온 감각이 새롭게 세팅되는 것 같다. 싱그럽고, 싱싱하게. 요괴 딸은 봄 곁에 있다는 것이 참 좋다.
요괴딸은 줄 노트, 칸 노트를 챙겨 들고 큰 방 문을 열었다. 누워있던 똑순애와 급한덕은 느릿느릿 겨우겨우 몸을 일으킨다. 왔구나. 왔어. 오지 않기를 바라던 것이 기어이 왔다는 움직임. 요괴딸은 다소 민망해졌다. 낱말 따라 쓰기를 마친 뒤, 한 단어 읽기를 했고 필사의 현장으로 넘어갔다. 오늘은 어린이가 직접 쓴 시를 엮은 책 <엄마의 런닝구>에서 '갯벌'이라는 시를 필사했다.
갯벌
조개를 잡으려고
호미를 가지고
갯벌을 파 보니
조개가 있다.
갯벌을 보니 꽃게가
기어가고 있다.
돌멩이를 보니까
소라가 달라붙어 있다.
갯벌은 바닷속이다.
서울 구일 초등학교 2학년 이수빈, 1994,7
갯벌에 사는 생명체를 따라 고요하게 이동하는 눈길이 귀엽다. '갯벌은 바닷속이다.' 마지막 행을 읽는데 갯벌에 물이 차오르고 바다가 되는 모습이 그려진다. 당연한 것이 경이롭게 받아들여진다.
필사 후 시를 읽었다. 한 행 씩 서로 번갈아가며 읽다가 시 전문을 각자 한 번씩 읽었다. 급한덕이 '개벌'이라 읽으니 똑순애가 '갯뻘'이라고 정정해 준다. 순한커플은 시를 읽고 무엇을 느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느낌과 생각을 묻는 질문을 어려워한다. "못 배운 사람이 뭘 알아. 몰라."라고 얼버무려버린다.
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오늘 시 쓰기 소재는 '비'다. 과연, 어떤 시가 나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