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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방인에게_31

그의 등에다 빨래하는 연습을 하다 잠이 들었다

by 고라니

그의 등에다 빨래하는 연습을 하다 잠이 들었다



우리는 내일의 예측불허인 문장을 기다렸다. 자다가도 내 등이 깨어있으면 살살 깨지 않게 시린 겨울의 등을 한 장 넘겨주었다.


한 번은 내 등에다 입을 대고 엉엉 울기도 했다. 내가 그를 울린 입장이 된 것 같아 가만히 기다렸다. 그는 한참 울더니 나에게 잠옷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잠옷을 갈아입고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내가 운 것처럼 기진맥진했다. 아침이 되면 꿈을 쓸 수 있다. 밤의 꿈을 아침에 적으면 입만 대도 줄줄 녹아버리는 다소 민망한 흐름일 거다.


등에다 말을 한다. 한동안 장난인 줄 알았다. 무슨 말이든 장난으로 받아들였다. 반복되니, 등에다 말하는 것이 그의 말하기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등에다 입을 대고 말했다. 말하는 동안 그의 표정은 알 수 없고 울림을 느꼈다.


한 번은 등 뒤에서 눈만 꿈뻑인 적도 있다. 300번쯤 꿈뻑이다가 내 등에 그림을 그렸다. 손가락으로 그리는 연습을 하고, 캔버스에 그림을 옮겼다. 물건 대용으로 내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물감을 짜 놓기도 했고, 메모한 종이를 붙여 놓기도 했다. 사용 한 뒤 정성스레 닦고, 후후 불어 말려주었다. 등 사용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굳이 그만하라고 할 이유도 없었다. 그가 내 등을 사용하면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그가 늦으면 나는 아닌데 등이 기다리는 것 같고, 그가 잠들지 못하면 내 등도 못 자서 종일 찌뿌둥했다. 내 등이 나와 분리되는 느낌. 등이 점점 나를 등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옷을 살 때도 등에 잘 맞는지, 뒷모습이 괜찮은지부터 살폈다.


등 사용은 점점 확장됐다. 내 등위에서 식탁보를 깔고 계란밥을 먹고, 심지어 비빔면도 먹었다. 책도 보고, 글도 쓰고, 앉아 있기도 했다. 용도를 변경하며 적절하게 잘 사용했다. 등을 사용한 후에 항상 내 등을 만져주었다. 긁어주기도 했고, 어루만져 주기도 했다. 얼굴을 부비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등이 한 마리의 고양이 같았다. 가볍게 마사지도 해주었다. 등을 그렇게까지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자연스러웠다.


하도 등을 사용하니 닳아 없어졌다. 금세 등이 자라났다. 사람들은 등을 사용해보지 않아서 등이 이런 비밀스러운 성장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사실, 이야기를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모르겠다. 끝이 김새느니 솔직하게 밝히고 싶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등에 입을 대고 나도 너의 등을 사용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어떻게 사용하고 싶은지는 모르겠다 했더니 그는 반기며 등을 맞대고 생각해보자 한다. 등을 맞대니 뭐 봤니 놀이로 이어진다. 뭐 봤니? 해도 집에 보이는 게 별로 없어서 추상적인 단어들만 나열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뭐 봤니?

네가 보지 않은 무엇

뭐 봤니?

빛과 어둠 사이

뭐 봤니?

빛과 어둠 사이 네가 보지 않은 무엇

그러다 문장으로 변했다.

뭐 봤니?

빛과 어둠 사이 네가 보지 않은 무엇이 집을 찾고 있어.

뭐 봤니?

빛과 어둠 사이 네가 보지 않은 무엇이 집을 찾는데 눈이 내려.


우리는 뭐 봤니에 아주 집중해야 했다. 손에서 땀이 다 나고 등에 불이 붙기도 했다. 이 놀이가 재미있어 매일 한다. 추상적인 문장이지만,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고 문장 안에서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이 나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뭐 봤니를 하면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둘 다 푹 잤다. 우리는 내일의 예측불허인 문장을 기다렸다.


나도 네 등을 쓰고 싶어. 네 등이 닳아 없어졌다가 다시 자라나는 걸 보고 싶어. 나는 그의 등에 주먹을 대고 빨래하는 연습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내일의 예측불허의 문장도 등에 재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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