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자판기_09

그날은 / 피에르 엠마뉘엘 리에 글. 그림

by 고라니

엽과는 따로 약속을 잡지 않는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촘촘하게 보내고 나는 대부분의 시간이 느슨하기 때문에 그녀가 짬을 내서 "언니, 어디예요?" 나를 부르면 우리는 만날 수 있다. 버드내 공원 길목에서 만난 '후투티'에 푹 빠져서 엽의 전화를 놓쳤다. 후투티가 내 시야에서 멀어지고 난 뒤 엽에게 전화를 걸었다. (후투티 본 거 자랑해야지)


"눈 보러 가요."


우리는 광양으로 넘어가 차를 마시기로 했다. 엽은 차 안에서 그림책 '그날은' 건넨다. 할머니의 죽음을 아이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책. 표지의 겨울, 눈부시도록 파란 색감이 눈 내리는 오늘과 잘 어울린다. 피에르 엠마뉘엘 리에 글, 그림 작가, 첫 작품인데 글과 그림이 너무나 훌륭하다.


어느 카페를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엽은 가려던 두 곳의 카페가 아닌 다른 카페에 즉흥적으로 차를 세웠다. '플랜 B' 카페. 카페 창 너머로 어마무시하게 거대한 ('크다'는 표현은 이 나무에 비한다면 너무 작다) 나무 한 그루가 늠름하게 서 있었다. 나무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에너지. 나무는 몇 살일까. 500년? 뻗어나간 가는 가지 끝에서도 생명력이 느껴진다. 뿌리는 또 얼마나 엄청날까. 나무 앞에서 나는 조약돌 한 개, 한 줌의 흙. 나를 돌과 흙으로 느낄 수 있는 게 위로가 된다. 장엄하고 경이로운 굳건한 서 있음에 숙연해진다. 봄에 잎이 돋으면 어떻게 달라질까. 나무의 미래도 궁금해진다. 나무 역시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중이겠지.


그나저나 엽도 나무처럼 대단하다. 아니 엽은 나무다. 한자로 나뭇잎 엽 (葉)을 쓴다. 말로 하는 위로가 아닌, 우울과 슬픔에 침몰당한 나를 산 앞에, 나무 앞에, 바다 앞에, 강물 앞에 그저 툭 떨궈 놓는다. 그다음은 알아서 하란 식. 내가 나 스스로 가둬둔 감정을 열 수 있도록 그저 옆에서 기다려준다. 함께 걸으며 마주한 나무, 새소리, 물빛, 풀들에 감탄하다 보면 어느새 울상이 웃상으로. 흐릿하던 눈빛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맥 없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촐랑대며 깔깔 웃는다. 혼자였으면 긴 침잠. 회복까지 꽤 오래 걸렸을 텐데 엽이와 만나고 나면 스르륵 괜찮아진다.


그림책 속 파랑이 떠나질 않는다. 파랑이 너울댄다. 영혼처럼. 하늘도, 바다도 파랗고 신비롭다. 죽음도 삶도 신비롭다. 파랑 언저리 어딘가에서 시작과 멈춤을 반복한다. 파랑의 색온도는 차다고 느껴왔는데 그림책 '그날은'에 펼쳐진 파랑은 그렇지 않다. 파랑과 다채로운 색감들이 어우러져 할머니 죽음을 따듯한 기억으로 감싸 안아준다. 책장을 넘길수록 포옹 안에 있는 듯 온기가 돈다. 모든 색에 빛이 들어있구나. 그림책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본다. 출구 없는 감옥에 갇힌 것처럼 막막했는데 잘 지내볼 희망이 생긴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엽과 문구점에 가서 2B 연필과 펜도 샀다. 연필을 새로 샀으니 어떤 질감일지 궁금해서라도 그림을 다시 그리게 될 것이다. 12자루의 연필이 손에 쥐기 힘들 만큼 몽당해지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백지에 무얼 그리고 무얼 써 놓을까.


내 손에서 쓰이는 기억. 기억이 되는 하루하루는 소중하다. 그림책 '그날은' 엄마랑 함께 읽고 싶다. 엄마랑 함께 그림책을 읽는 기억을 선물하고 싶다.


고마워. 엽.

그날은 덕분에, 괜찮았어.

-할머니에게


그날은 손님이 무척 많았습니다.

모르는 사람도 꽤 있었지요.

다들 검고 흰 차림이라

꼭 눈 덮인 숲 속 같았습니다.

할아버지는 거기 없는 사람처럼 앉아 있었고

당신은 거기 정말로 없었습니다.

그날은 해가 영 기를 펴지 못했는데

구름 사이로 문득

당신이 보였습니다.

나는 집을 나서 산으로 향했어요.

하늘하늘 눈이 내리고 있었지요.

보드랍고 새하얀 당신의 머릿결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기억합니다.

당신과 함께한 긴 산책을 기억합니다.

단정히 묶어 올린

머리 타래를 기억합니다.

고운 빛깔로 가득한

치맛자락을 기억합니다.

영화를 볼 때면 건네주던

아이스크림을 기억합니다.

아파 고생하던

발목을 기억합니다.

당신을 마지막으로 봤던 때가

기억나질 않아요.

그렇지만 당신의 손을 꼭 잡았던

그 순간만은 기억합니다.

그날 할아버지는 나를 찾아 산을 올랐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났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림책 '그날은' 전문


"언니, 기억하면...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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