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즐거운 산책
눈이 폴폴 내리는데 그 마음 어쩔 줄 몰라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갔다. 바람이 강해서 오래 걷기에는 무리였다. 들고 나온 가방 속 책이 젖을까 봐 목적지를 바꿨다. 정해진 목적지가 없어서 일단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맞다! 내게는 호수가 있다. 갑자기 든든한 마음이 든다.
아... 귀여워.
버스정류장 근처 벤치에 누군가의 솜씨로 탄생한 꼬마 눈사람이 앉아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던 이가 만들어 놓은 걸까. 약간 처진 긴 눈에 코가 오똑한 꼬마 눈사람은 배시시 웃고 있다. 꼬마 눈사람 따라 저절로 해사한 눈웃음이 지어진다. 태어난 지 좀 되었는지 새로 내린 눈들이 살살살 내려앉아 있었다. 나를 미소 짓게 해 준 누군가의 솜씨가 고맙다.
눈 내리는 호수공원은 한적했다. 뽀득뽀득 꾹꾹 눈을 밟으며 걸음을 차근차근 옮겼다. 쌓인 눈길 걷기 얼마만인지.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기분 좋게 진동한다. 늘 복작이던 물닭들의 핫 플레이스도 고요하다. 다만, 멀구슬나무에서 빽빽이는 직박구리만이 요란하다. 호수는 반쯤 얼고, 반쯤은 녹아있다. 작은 새 한 마리가 얼어 있는 호수에서 놀고 있다. 내가 저처럼 가볍다면, 얼음장 위에서 미끄러지고 싶다. 호수 얼음은 살짝 에메랄드 빛이 돌아서 신비롭다.
두 번째로 만난 누군가의 솜씨. 하트 눈뭉치. 누군가의 솜씨에서 누군가의 행복한 마음까지 전달되는 듯하다. 잠시, 머문다.
바람이 차서 더 걷기가 힘들어져 도서관으로 피신했다. 도서관에서 나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까. 집으로 갈까 고민했다. 집으로 가는 22번 버스가 11분 후면 도착한다. 오예! 카페 대신 집을 선택했다. 22번 버스는 뱅뱅 돌지 않고 집으로 바로 가는 버스인데 배차간격이 너무 커서 좀처럼 타기 힘든 버스다. 탈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데, 세 번째로 만난 누군가의 솜씨.
눈 쌓인 바닥에 "빛나"라는 글씨를 써놓았다.마음이 다 환해지는 기분.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 누군가의 솜씨 덕분에 즐거운 산책이었다. 세 번째가 마지막 누군가의 솜씨라고 생각했는데...
집 들어가는 골목에서 크다만한 어른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크고 작은 눈덩이 두 개를 보는데 나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는 이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어헝어헝어헝"
네 번째 솜씨는 솜씨의 현장을 목격한 셈. 남자는 내가 웃자, 수줍은 듯 미소 지으며 고개를 돌린다. 집에 들어와서 생각해 보니,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였던 것도 같다.
눈사람 만드는 게 웃을 일은 아닌데...
누군가 앞에서 그렇게 웃다니... 부끄러울 일인데, 그저 반갑고 즐겁다.
눈사람이 어떻게 완성되었을까.
나가보니 눈사람은 정말 눈만 있다.
제대로 눈사람이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눈발이 소용돌이처럼 날린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솜씨가 탄생 중이겠지. 네 번째 누군가의 솜씨에 코와 입을 얹어보았다.
누군가의 솜씨들을 만날 수 있는, 눈 오는 날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