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동천 기록

순천 동천

by 고라니


지난 11월, 겨울 초입. 책방 '심다'의 '동천 사운드 워킹 프로그램' <소리로 만나는 동천>에 참여했다. 프로그램이 알차서 매 회차마다 흥미를 잃지 않고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4차시 수업이 '업사이클 카메라 만들기(천천히 걷고, 보고 , 담기)'였다.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다.


흔히 '똑딱이'로 불리는 '일회용 카메라'를 '업사이클링 카메라'라고 칭했다. 분해와 조립만 할 수 있다면 '일회용'이 아닌 '다회용 카메라'로 사용가능하다. 오.


'필름로그' 직원 분이 카메라를 분해해서 필름을 넣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상세히 알려주셨다. 기계치에 똥손인 나에게는 매 과정이 순조롭지 않았다. 적당한 힘조절이 되지 않고, 부품들의 아구가 어긋난다. 옆자리 앉은 똘똘하고 친절한 친구는 자기 것 하랴. 나 돕느라. 카메라 두 개를 분해하고 조립한 한 셈이다. 그녀 옆에 앉지 않았다면... 윽. 생각하기도 싫다. 필름은 흑백과 컬러 중 선택할 수 있었는데 나는 '흑백' 필름을 선택했다. 색이 빠진 동천의 풍경이 궁금했다.


서울에 다녀오고 나니, 필름 제출일이 빠듯하다. 후딱 나가서 동천의 풍경을 똑딱이 카메라로 뚝딱뚝딱 찍었다. 하필 그날 몹시 바람이 세차게 불고 추워서 느긋하게 찍을 수가 없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바람은 휘몰아쳐서 혼란스러웠지만 이 생각 하나는 붙들었다.


'손가락 조심해.'


똑딱이 카메라 초보자들은 손가락으로 렌즈를 가려서 인화된 사진에 손가락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한다. 그건 피하고 싶었다. 툭툭 껴든 사진 속 손가락은 어떤 날 눈치 없이 나대는 내 모습 같아서 보기 싫었다. 카메라를 쥘 때 손가락 위치를 계속 의식했다. 손가락 저리 가. 눈치 좀 챙겨.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프레임에 담길까. 사진이 될 풍경의 경계도 가늠할 수 없었다. 뭔가 답답했다. 사진이 망했을까 봐 불안도 했다. 어떻게 찍힐지 모르는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계속 찍어야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찍힌 사진을 확인할 수 없는 답답함은 자유로움으로 바뀌었다. 몸도 더 많이 사용했다.


휴대폰 사진은 휴대폰을 든 손목의 각도가 구도에 영향을 주었지만, 카메라로 찍으니 몸을 굽히고 기울이고 쪼그려 앉아야 했다. 대상을 좀 더 크게 찍기 위해서 줌이 아닌, 팔을 있는 힘껏 뻗어야 했다. 대상을 향해 뚜벅뚜벅 다가가야 했다.


휴대폰으로 찍을 때는 찍는 순간 사진을 바로 확인하며 실망과 좋음이 오가지만 똑딱이 카메라는 실망과 좋음을 유보했다. 오로지 찍는 순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물소리, 바람소리, 풀들이 부딪히는 소리, 낙엽 소리 등 소리에 집중하고 귀 기울이며 사진을 찍었다. 시각보다 청각을 더 많이 열고 사진을 찍는 경험은 색다르고 흥미로웠다. 내 안의 어딘가가 들썩들썩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진 찍기는 달라졌다. 처음엔 실제로 소리가 나는 풍경을 찍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바라보고 있는 지점의 소리를 상상했다. 얕은 풀숲 사이에 하얀 깃털 하나가 내려앉아 있었다. '이 새는 누굴까. 어떤 소리를 낼까.' 소리를 상상하며 셔터를 눌렀다.


멀구슬나무 열매는 바람이 불면 어떤 소리가 날까. 바닥에 떨어질 때는 공처럼 통통통 구를까. 열매 여러 개가 떨어질 때는 어떤 소리가 날까. 대상의 소리와 움직임을 상상하면서 찍으니 훨씬 더 자유로운 마음으로 셔터를 누를 수 있었다.


좋아하는 고마리도 보여서 두근. 두근. 심장소리까지 더해 똑딱. 해가 금방 지고 손이 시렸다. 아직 필름이 남아있다. 동천 근처 카페로 들어가 몸을 녹이려고 들어갔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진 바깥. 카페 안에 아무도 없어서 실내 풍경도 찍어보자. 실내니 유념했다. '플래시 꼭!' 책의 표지나 흑백 사진의 단골손님. 커튼이 드리워진 이미지를 야심 차게 흉내 내보았다.


한 달여가 지나 동천 소리 풍경을 찍었던 사진을 파일로 볼 수 있었다. 내가 찍었다고? 찍은 나와 찍힌 사진 사이에 묘한 거리감이 생겼다. 언제 찍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순간도 있었다. 흑백필름인데도 빛에 따라 사진이 다양한 색감을 가진 듯 보였다. 그날의 빛과 바람이 느껴졌다. 흑백이라 옛날 풍경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카페 실내에서 찍은 사진은 형상이 보이지 않았다. 깜깜했다. 커튼 사진으로 추정되는 사진도 그저 까맸다. 웃음이 났다. 의도는 보란 듯 어그러졌고 의도하지 않았는데 마음에 드는 사진도 몇 장 있다.


다그락다그락. 어! 호두알이다. 바로 앞에 호두알을 굴리며 지나가는 어르신이 있다. 이모부는 잘 계실까. 이모부는 손운동에 좋다며 늘 호두알 두 개를 항시 굴렸다.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그 소리. 그때는 호두가 어른용 장난감 같은 것인 줄 알았다. 돌아가신 이모부의 모습은 희미한데 호두알 다그락 거리는 소리는 선명하다.

소리 풍경을 찍기. 사진 찍는 다른 방식을 배웠다. 잠자고 있는 디지털카메라를 꺼냈다. 필름 카메라는 아니지만 휴대폰에 길들여진 사진과 다른 사진이 나올 것 같다. 소니 카메라를 추천해 준 이도 덩달아 떠오른다.


그의 모습은 희미하지만, 그가 연주한 피아노 소리는 여전히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연말파티 때 그는 행사장 피아노로 영화 '라라랜드' ost 'City Of Star'를 연주했다.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이 울려 퍼지자 그곳은 더 이상 지루하고 시끄러운 행사장이 아니었다. 다수의 여자들은 황홀한 눈빛으로 그의 연주에 숨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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