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온 날

by 고라니

부스스 일어나 어제 냉동실에서 꺼내 놓은 청국장부터 찾았다. 신김치, 무, 양파, 마늘, 돼지고기를 챙겨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아빠가 뭐라 하는데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아빠 쪽을 돌아보니 “눈~ 왔다고.” 큰 소리로 외친다. 눈이 살짝 덮인 하얀 마당. 그제야 바깥 풍경이 보인다. 어쩐 일이지. 눈을 보면 좋아 날뛰던 나였는데... 무를 타박타박 썰었다. 그래도 눈이 오니 나가서 걷고는 싶었다. 순천에 눈이 쌓일 정도면, 다른 곳에는 눈이 무척 왔겠다. 청국장을 마지막으로 풀고 바글바글 끓인다. 시원하고 구수한 순한맛 청국장. 한 그릇 뚝딱. 김을 곁들여 먹으면 더 맛있다.


아침을 먹고 가방을 쌌다. 반납할 책과 노트북을 챙겼다. 그러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지. 점심도 먹어야 하는데... 점심 먹고 나갈까. 그건 또 싫었다. 집에 있으면 누울 게 빤하니까. 그러다 몸을 일으키기 싫어질 게 또 빤하니까. 빤한 일은 눈 온 날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눈이 왔으니 눈을 밟자. 문득, 눈여행을 하고 싶다던 조카 이준이 생각이 났다. 이준이를 생각하면, 마음속에 환한 빛이 피어난다. 미소가 번진다. 안부가 궁금해진다.


조심조심 걸었다. 눈길에도 씩씩하게 걸을 수 있는 미끄럽지 않은 따뜻한 신발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발이 시리지 않는 포근한 신발.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문득, 유난히 눈이 많이 오던 고향 강원도 태백 풍경이 떠올랐다. 눈이 대책 없이 많이 오면 제시간에 버스가 오지 않았다. 기약도 없는 버스를 무작정 한참 기다려 버스를 타고 내려서는 발이 푹푹 빠지는 길을 걸어 언 손 언 발로 아파트 청소일을 했던 엄마. 겨울이 유독 길었던 그곳에서 엄마는 청소일을 오래 했다. 병을 얻고서야 청소일을 그만두고 순천으로 내려왔다.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게 눈이다. 눈만 오면 엄마는 고약한 표정을 짓고 화를 냈다. 아빠와 내가 눈을 보며 좋아 들떠 있으면 엄마는 눈이 싫다고 지긋지긋하다고 꼴도 보기 싫어했다. 엄마는 의학적으로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자신의 병을 눈 때문이라고 스스로 진단했다.


눈은 나에게 선물이었다. 세상에서 눈 오는 게 제일 좋았다. 흰 눈으로 뒤덮인 세상은 반짝였다. 추웠지만, 눈이 오면 포근했고 시끄러웠지만, 눈이 오면 고요했다. 쌓인 눈 위를 뒹굴뒹굴. 눈썰매를 타고 눈싸움을 했다. 친구가 없어도 좋았다. 눈과 놀다 보면 친구들이 모였다. 눈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해 주었다. 바다에서 눈송이가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면 정말 낭만적일 것 같았다.


순천은 눈 보기 힘들어서 눈이 오면 더욱 반가웠다. 눈이 잠깐잠깐 내려서 그 순간을 포착하려고 수시로 밖을 내다보았다. 마침 눈이 오면 눈 싫어하는 엄마를 피했다. 눈을 만끽할 수 있는 기쁨을 잠시라도 한껏 누리고 싶었다. 매해 첫눈이 언제 올까. 어떤 순간에 첫눈을 맞게 될까 손꼽아 기다렸다.


올해는 엄마가 없으니, 엄마 눈치 안 보고 눈을 마음껏 좋아할 수 있는데, 마음이 이상하다. 내가 좋아한 것들은 엄마가 있었을 때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걸까. 엄마가 좋아한 것뿐 아니라 싫어한 것으로도 엄마를 그리워하게 된다. 무엇을 싫어하는 마음을 헤아릴 줄 몰랐다. 나는 여전히 눈이 좋은데, 눈이 싫다고 말하는 엄마가 옆에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꼭 껴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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