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따끈따끈한 신상 이름

by 고라니

저는 본명 외에도 다른 이름들이 수두룩한 사람입니다. 주름이 늘어가는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지만 이름도 점점 늘어나요. '단어'를 좋아하는 까닭에 이름 짓기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름은 내가 누구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해요. 최근 새롭게 지어진 따끈따끈한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해요. 아!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아메리카노 연하게 한 잔 주세요."

"적립해 드릴까요?"

"네. 4376이요."

"장숙미 님 맞으세요?"

"네."


원래 예식장이었던 건물이 카페로 리모델링되었다. 수년이나 비어있던 건물이었는데 이제는 빵과 커피를 판다. 카페 이전에, 이 건물 실외창고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거지'라고 부르는 이가 살고 있었다. '거지'는 대형마트 카트를 여러 개 창고 앞에다 너저분하게 늘어놓았다. 마트에서 유통기한 임박하거나 팔 수 없는 음식들을 카트에 실어 얻어 오는 게 아닌가 추측했다.


카페 오픈이 임박하자 창고 앞 카트는 모두 사라졌고 '거지'도 보이지 않았다. 동네를 떠나 어딘가로 거처를 옮겼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예상과 달리 '거지'는 카페 근방에 다시 거처를 마련했다. 주차장 구석에 좁은 가건물이었는데 거기에서 거지가 나오는 걸 엄마가 봤다고 했다. 엄마는 주차장에서 걷기 운동을 하는데 햇살이 좋으면, 거지가 밖으로 나와 주차장 담벼락에서 꼼짝 않고 서 있는다고 했다. 엄마는 거지가 그러고 있으면 운동을 할 때,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싫은 티를 내면서도 날이 추운 날에는 거지를 걱정하기도 했다.


엄마는 운동을 다녀오면 '거지' 이야기를 꺼냈고, 꺼내지 않는 날은 내가 먼저 '거지'를 봤는지 물어봤다. 나는 이 동네에 4년째 살고 있지만, 거지를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엄마에게는 쉽게 보이는 거지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엄마에게 들은 바로는 거지는 키가 크고 홀쭉한데 겅중겅중 뜀박질도 잘한다 했다. 한 번은 엄마가 운동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거지에게 만원을 주니 거지가 우렁찬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인사했다고 한다.


이 카페에서 나는 '구라니'다. 주문을 하고 적립 번호를 말하면, 아르바이트생이 "구라니 님 맞으세요?" 할 때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전의 나였다면 구라니가 아니라 고라니라고 바로 정정을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이름으로 불리는 짧은 순간이 즐겁다. 맞다. 별 게 다 즐겁다.


나는 본명 외에도 여러 개의 이름이 있다. 나 스스로를 '빵가'라고 부른다. 자우림의 노래에 열광했던 대학시절, 그들의 '김가만세' 노래를 듣고 나는 '빵가'라는 닉네임을 만들었다. 방숙미. 이름을 말하면 한 번에 잘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고, 순미, 미숙이, 박순미... 등으로 잘못 불렸다. 사실, 나 역시 내 이름이 늘 어렵게 여겨졌다. 들으면 쉽게 기억되는 이름을 짓고 싶었다. 몇몇 친구들은 나를 '빵가'라고 부른다. 친구들의 아들딸도 빵가 이모라고 부른다.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때는 '빵쌤'이었다.


스물일곱, 첫 해외여행으로 인도에 갔을 때 인도 친구 쉐리프가 나에게 '라니'라는 이름을 선물해 주었다. 그는 힌디어로 라니는 '여왕' , '물'이라는 뜻이 있다고 했다. (쉐리프가 영어로 말했으므로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서른 후반, 그림책 '채소들의 목욕탕' 작업을 할 때 '타코미'라는 필명을 썼다. 당시, '문어의 영혼'이라는 책에 푹 빠져 있을 때였다. '채소들의 목욕탕'은 일본 서점에도 입점이 되었고 일본인에게도 친숙한 느낌이 드는 이름을 짓고 싶어서 타코(문어)와 숙미를 합쳤다.


타코미가 끝이 아니다. 엄마가 부르는 애칭 '미야'와 아빠가 부르는 '고'가 있다. 이 밖에도 돌을 좋아한다고 티 내고 다녔더니 돌언니, 돌이모라는 별명도 생겼고, 그림책 '시시시작'을 만들 때 요상하고 괴상한 딸의 줄임말 '요괴딸'이라는 필명을 만들었다. 그림책 동아리에서는 '풀친구'라고 잠깐 불리기도 했다.


프랑스어에 능통한 혜혜언니에게 프랑스식 이름을 부탁했더니 수공(手工)을 의미하는 마뉴엘 'manuel'을, 두 살 된 조카는 빵고모를 줄여 (깜찍하게) '빵곰'이라고 부른다. 조카와 영상통화 할 때는 장갑 인형 '또또'가 되기도 한다.


이 카페에서 나는 '구라니'다. 오전 내내 집에서 무기력하게 축 늘어져 있다가 점심을 먹고 무작정 몸을 일으켰다. 바람도 불고 비도 꽤 온다. 나오기 귀찮았지만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되지만, 무얼 쓰게 될지 모르는 채로 일단 노트북을 열었다. 장한 구라니, 구라니다.


앞으로 나와 타인으로부터 어떤 이름들이 지어질까. 얼마나 더 늘어날까. 무엇보다 어떤 이름들과 만나게 될까. 아! 맞다. 잊고 있었던 이름도 떠올랐다. 초등학교 때 펜팔친구는 나를 빵숙이라고 불렀다. 이름을 적다 보니 거지 이름도 궁금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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