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혹은 개구리밥
오늘 치과에 가야 하는데 치과 근처 카페로 왔다. 어제도 치과에 가야 했는데 미용실에 갔다. 치과 예약을 미루고, 피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 이가 욱신욱신 아렸다. 어금니인지 송곳니인지 정확히 꼬집을 수 없이 전반적으로 윗니와 아랫니의 안쪽에 통증이 있다. 생리하기 2주 전쯤에는 유독 통증이 심했다. 한 번 통증을 느낀 이후로는 온 신경이 이에만 집중되고 있다. 실은 통증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치과에 갔을 때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다.
치료 견적이 얼마나 나올지, 발치를 하고 임플란트를 해야 하는 치아가 있다면 어쩌지. 미루지 않고 진작, 치과에 왔으면 임플란트까지는 안 갔을 텐데... 다들 치과 보험이 있는 것 같던데, 나는 그런 것 하나 들어놓지 않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 하다니... 잠들기 전까지 괴롭히겠지. 다행인지 자책하는 동안, 통증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실은 치료 비용도 비용이지만, 치과의사에게 입을 벌리고 치아를 공개해야 하는 상황이 불편하다. '이 지경이 되도록 치과에 안 오다니. 대단한 여자야.', '이 여자의 삶은 입 속 치아처럼 엉망진창이겠군.' 가상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와 나를 괴롭힌다. 목소리의 강도는 점점 더 세져서 더욱 치과에 갈 수 없게 만든다.
작년에는 스케일링도 하지 않았다. 스케일링은 1년에 한 번 해야 한다는데, 나는 스케일링을 하고 난 뒤 치아와 치아 사이에 생기는 구멍이 싫고, 치석을 갉아내면 치아가 더 시린 것 같아서 피하고 있었다. 아랫니 뿌리 쪽에 누렇게 치석이 자리 잡고 있다. 윗니 쪽도 보나 마나 치석이 한 자리 차지 않고 있을 것이다.
카페에서 책에 눈을 두고는 있지만 치과 예약 못하는 못난 스스로를 자책하느라 괴로웠다. 카페 안으로 두 여자가 들어왔고 그중 한 여자는 목청이 엄청나게 컸다. 카페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더 이상 피하지 말자."
목청 큰 여자는 친구에게 피하지 말라며 설득하고 있었다. 목청 큰 여자의 말은 나를 움직였다. 나는 주저 없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벽에는 생뚱맞게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용 초록색과 은색 구슬이 걸려 있었다. 구슬을 보면서 치과에 전화를 걸었다. 철 지나고 쓰임새를 잃은 구슬이 주는 위로가 있었다.
드디어 치과를 예약했다. 2년 만이다. 화장실 벽면에 아무것도 없었다면 용기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목청 큰 여자에게도 고맙다. 더 이상 피하지 말자는 그녀의 조언이 나에게로 와 제대로 먹혔다.
치과 의사는 치아를 쓱 살펴보더니 호탕하게 말했다.
"치아 괜찮으세요. 충치 치료는 받으실 필요 없어요."
"예?"
의사가 나를 놀려 먹는 게 분명했다. 이럴 수는 없다. 엑스레이를 잘 못 보았다고 다시 번복하겠지. 그런데 의사는 번복하지도 않았고, 더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럼 왜 치통이..."
"치통이 치아 때문만은 아니에요. 잇몸이 좋지는 않으세요. 잇몸이 들떠있어요."
"아... 네..."
"치아 뿌리가 엄청 얇네요. 나이 들면, 치아가 쉽게 흔들릴 수 있어요."
"그럼, 조만간 임플란트 해야 하나요?"
"아주 먼 일이에요."
치아 뿌리가 엄청 얇다는 의사의 말이 나에게 콕 박혔다. 내 인생을 요약하자면 '뿌리 없음'이다. 자유롭게 떠돈다고 믿었던 20대~30대를 지나 40대에 이르렀다. 과거의 삶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그땐 그때대로 순간순간 끌리는 일들을 시도하면서 살았다. 시작도 끝도 즉흥적이었다. 쉽게 해 보고 쉽게 그만두었다. 연애도 쉽게 시작하고 쉽게 그만두었고, 일도 쉽게 시작하고 쉽게 그만두었다. 그래서 아쉽냐고? 그다지 아쉽지도 않다. 쉽게 살고 싶었고 그렇게 살았다. 그땐 좋았다. 쉽지 않았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일들이 많다.
다만, 이제 와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꽤 오랜 시간 하고 싶은 일도, 사명감이 느껴지는 일도 없다. 친구들의 삶을 둘러보면 지금까지와 완전 다른 길로 전환해 새롭게 배우고 시도하는 이도 있고, 과거의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며 정성스레 일상을 꾸려나가는 이도 있다. 나는 이도저도 아니다. 그저 눈 뜨고 있으니 산다. 살아도 삶이 아닌 것 같은 모호한 느낌만 맴돈다.
스케일링을 받으면서, 양손을 악수하듯 잡고 '나무'만 되뇌었다. 피도 나고 시리고 아팠다. 통증이 심하면 왼손을 들라고 했지만 악수를 풀고 양손 깍지를 꼈다. 손가락과 마디에 힘을 꽉 주었다.
스케일링을 해주던 간호사. 깊은 밤인데, 별이 하나도 떠 있지 않은 눈빛이었다. 계산을 하는데, 스케일링은 보험 적용이 되니,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받으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네. 그럴게요. 고맙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마음속으로 준비한 인사를 찬찬히 말하고 치과를 나왔다.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봄에 싹을 틔우고 가을에 열매를 맺는 생명력이 긴 나무와 같은 삶은 내가 우러러볼 뿐, 나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아마도 나는 연못 위의 개구리밥이나 부레옥잠에 가깝지 싶다.
누구에게나 삶은 완성보다는 미완성에 가깝지 않나. 누구에게나 삶은 확실하기보다는 불확실에 가깝지 않나. 누구에게나 삶은 기쁨과 즐거움이 찾아오지만 불안과 초조함이 머물 때도 있지 않나.
치석이 떨어져 나간 이 사이로 바람이 실실 들어온다. 입을 꼭 다물어도 소용없다. 누구에게나 치과를 갈 때는 미루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나. 나는 '누구에게나'일뿐이다. 나무처럼 살 수는 없더라도 나무를 우러러보며 살 수 있다는 건, 분명한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