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출구가 궁금해요

-나의 메니에르에게

by 고라니


출구가 없다 여겨진 막막한 상황에서도 당신을 잊지 않고 기다려준 출구가 무엇이었는지요.

당신의 출구에 대해 듣고 싶어요.



나의 메니에르에게


너의 방문은 정말 급작스러웠어. 난 그때, 정말 나에게 주어진 일을 잘 해내고 싶었거든. 먹는 거, 자는 거 다 뒷전이었어. 어떻게 하면 이 프로젝트를 더 잘할 수 있을까... 거듭 고민했어. 그러다 다음날 아침에 극심한 어지러움과 귓속이 꽉 막힌 먹먹한 느낌. 쇳소리가 갈리는 진동 있는 이명으로 일어날 수가 없었어. 제일 무서웠던 건 어지러움증.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방이 빙빙 돌았어. 하루 쉬면 괜찮겠지. 다음 날 또 같은 증상이 발발해 결국 동네 이비인후과에서 외래진료를 받았어. 어지러움증은 좀 가라앉았는데 자동차, 사람, 음악 등 모든 소리가 괴롭게 했어. 귀의 오른쪽 왼쪽 중구난방으로 소리가 침입했어. 볼륨도 제멋대로였고 고장 난 텔레비전에서 나는 지지 직하는 잡음까지. 결국 입원을 하게 되었지.


의사가 말해 준 너의 이름은 메니에르*


좀 엉뚱하게도 나는 네 이름이 마음에 들었어. 우아하고 부드럽게 흐르는 듯한 느낌. 한 번 듣고도 잊지 않았지. 일주일 입원을 했는데도 오른쪽 귀의 청력은 회복되지 않았어. 정상 청력인 왼쪽 귀로 들으면 풍성하고 입체적인 소리인데도 오른쪽 귀로 같은 소리를 들으면 납작하고 볼륨이 줄었어. 양쪽 귀에서는 쉼 없이 이명이 들렸어. 의사는 더 할 게 없다며 외래진료 받으면서 경과를 지켜보자 했지. 솔직히 화도 나고, 속상하고 억울하기도 했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난 그저 열심히 살아보려 했던 것뿐인데... 울분에 차 있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도했어. 어느 날 갑자기 네가 온 것처럼 그렇게 사라지게 해달라고. 그 순간 이건 아니다 싶었어. 네가 나와 있는 동안 잘 지내게 해달라고.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떴는데 병원 주차장 바닥 글씨를 보고 울음이 터져버렸어.


'출구'


언제 어지러울지 알 수 없는 불안감. 이명 때문에 영원히 고요함을 잃어버리게 되는 건 아닐까. 막막한 이 상황에도 과연 출구가 있을까. 하지만 '출구'라는 글자를 붙들고 싶었어. 외래진료를 받으러 다니는 게 오히려 스트레스 상황을 가중시키는 것 같아서 관두었어.


꽤 오래 집 안에서 웅크리고 지냈어. 친구들도 만나지 않고 고립된 채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렸어. 무기력해서 몸을 일으키기조차도 쉽지 않았지. 눈 뜨기가 무서웠어. 천장이 네모가 아니라 빙글빙글 돌까 봐. 이러다 돌겠구나. 순천에서 꽤 인지도 있는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으려고 알아보았는데 예약이 너무 밀려있어서 포기했어. 이대로 더는 안 되겠다 싶을 때 너에게 말을 걸었어.


"나는 이제 너와 무엇을 해야 할까? 숨바꼭질? 잡기놀이?"


나는 '균형 잡기 놀이'를 너와 함께 시작해 보려 해. 나와 타인, 안과 밖,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잡아서 나를 회복해 보자.


제일 먼저 요가책 [요가 디피카]을 펼쳤어. 디피카는 '빛'이라는 뜻이더라. 오, 좋아. 출구와 빛은 나에게 희망으로 다가왔어. 스스로의 힘으로 바로 서자. 그나마 쉬워 보이는 자세를 그려서 한 장 한 장 벽에 붙이고 따라 했어. 책으로 배우기, 그림 그리기.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요가를 시작했어.


잘 먹기로 했어. 커피는 한 잔으로 줄이고 싱겁게 먹기. 단순한 일상. 해야 한다는 압박이 없으니 잠자는 시간도 점차 늘어갔어. 늘 불면으로 고생했는데 3시간씩 통잠을 자기도 했어.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했어. 이불 개고 털기, 청소, 손빨래, 설거지 등 전엔 몰아서 하던 일들을 조금씩 매일 했어. 짧게 짧게 걷기 시작했어. 동네 마트에서 장도 보고 부모님 심부름도 다녀올 수 있게 되었어. 한 동안 놓았던 책도 다시 읽어졌어.

그때 그림책 동아리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왔어. 그림책 만들기에 집중해 보기를 권했어. 무리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려보라고. 응원을 받으니 용기가 생겼어. 조각조각 작은 그림들을 그렸어. 한 페이지 한 페이 그림 조각들을 배치했더니, 어느덧 두툼하게 그림들이 쌓여갔어. 그림책에 집중하니 이명도 의식되지 않았고 어지럼증에 대한 불안이 줄어들었어.


세상의 소리들이 불편한 건 여전했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뒷산을 짧게 오르는 동안의 새소리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어. 컨디션이 괜찮을 때는 뒷산에 갔어. 오전에는 요가, 오후에는 뒷산. 하루하루 요가와 뒷산을 오르는 시간이 쌓여가니 삶의 활력이 생기고 뭔가 하고 싶어졌지. 전주로 1박 2일 여행도 가능해졌어.


너에게도 출구가 보이지?


-

*메니에르

내이에 발생하는 질환으로 난청, 현기증, 이명(귀울음)의 3대 증상을 특징으로 하는 질환. 1861년 프랑스 의사 메니에르에 의해 처음 기술되었다. 메니에르병은 급성현기증을 일으키는 가장 대표적인 내이질환이다. 귀에 무엇이 꽉 차있거나 막힌 느낌이 들 수 있는데 이를 이 충만감이라고 한다. 이충만감은 발작의 신호로 나타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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