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순간을 기록하나요

기대와 기록

by 고라니

글쓰기가 시작된다. 이미 시작되었다. 시작되기 전보다 일부는 분명히 좋아질 것이다. 내가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하지만 무얼 쓰게 될지는 모르겠다. 뭐든 쓰게 될 거라는 것은 안다. '모르겠다'와 '안다' 사이에 어렴풋한 희망이 아른댄다.


심장내과 5인실 병동. 창문 옆 자리. 흐린 하늘과 무척이나 피곤한 기색의 엄마 얼굴. 입원 후, 더욱 검어지고 파리해진 엄마 얼굴, 걱정하니 엄마는 내 얼굴이 누렇게 떴다고 되려 걱정한다. 병원에서 지나치는 사람들 모두는 왜 아파 보이는 걸까. 의사도, 간호사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도 어딘가 아프고 불편해 보인다. 병원 조명의 문제일까. 아픈 사람들의 에너지가 공간을 장악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모두 아픈 구석이 있는 걸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기다린다.


기다림의 연속. 병원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은 기다리면서 사라진다. 의사를 기다리고, 밥을 기다리고, 검사를 기다리고, 별일 없기를 기다리고, 잠들기를 기다리고, 퇴원수속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틈틈이 기록을 한다. 노트북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좋은 의사를 만난 적이 거의 없다. 의사 복 없는 편. 아, 딱 한 명. 과잉진료를 하지 않는 멋진 치과 의사 선생님이 있었다. 그런데 그 치과는 아쉽게도 얼마 못 가 문을 닫았다. 아, 또 있었네. 동네에 있는 내과. 위 내시경을 하는데 의사 선생님께 수면 내시경이 겁난다고 하니 일반으로 해보라고 '금방 끝난다'며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좋은 의사에 대한 경험담은 딱 여기까지다.


질문을 꺼려하는 직업군의 순위를 매기면 상위권에 '의사'가 있지 싶다. 여러 번 CT를 찍기에 이전에 찍은 CT와 어떤 점이 다른지 물었더니 눈을 피하면서 아주 귀찮다는 듯 성의 없는 대답만 돌아온다. 물론 의사는 무척 바쁘기 때문에 환자 이야기를 다 들어줄 여유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태도에는 기분이 상한다. 그럼에도 나는 굴하지 않고 질문을 한다. 무슨 검사인지, 검사를 하면 무엇을 알 수 있는지, 보험 적용은 되는지. 질문들을 하고 나면 다음 회진 때 의사는 두 세 걸음쯤 뒤에서 내 눈을 피하며 바쁘다는 몸짓을 보인다. 의사가 나를 꺼린다는 것을 눈치채면서도 유연하게 대처하지는 못한다. 나도 엄마 보호자로서 마음이 바쁘다. "바쁘신데 제가 질문을 해서 죄송해요." 이 한 마디를 먼저 했다면, 의사의 태도는 달라졌을까.


의사가 검사하라면 무조건 검사하는 말 잘 듣는 환자와 보호자가 그들 입장에서는 편하겠지. 나도 그런 보호자였다. 그런데 어떤 의사들에게서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노골적으로 검사만 시킨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번에도 그랬다.


엄마 입원 2일 차, 오후 3시경. 입원하게 된 목적이었던 '관상동맥조영술'과 '우심도 좌술' 검사가 끝났다. 전 날 12시부터 오늘 오후 3시까지 금식을 한 후 시행된 검사였다. 엄마는 한 끼만 걸러도 기력을 잃고 눈이 쑥 꺼진다. 전날에는 오전 중 검사가 가능하다고 하더니 밀리고 밀려서 결국 오후 3시에 받게 된 것.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엄마는 원래 병원이 다 그렇다며 체념하고 기다렸다. 아침, 점심 2끼를 금식하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엄마는 입원해서 2Kg 가까이 체중이 빠졌다. 검사 끝난 뒤, 2시간 정도는 지혈을 해야 해서 꼼짝 않고 누워있어야 했다. 식욕을 잃으셔서 저녁도 조금밖에 드시질 못했다.


교수는 작년부터 오른쪽 심장 기능이 떨어지고 오른쪽 심장이 커져 있는 건 맞다. 그러나 검사로는 정확한 원인을 파악할 수 없으므로 약처방도 내릴 수 없다고 했다. 엄마와 나는 검사 결과로 부어있는 심장을 정상 크기로 줄일 수 있는 약 처방이 내려지고 엄마의 숨이 덜 차서 잘 걸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다. 교수는 전신경화증, 폐섬유화로 인해 심장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애매한 소견. 그건, 나도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선생님. 제가요. 추운 데서 청소 일을 오래 했거든요. 그때 온 몸댕이가 얼어갖고 이런 병에 걸린 게 아닌가 싶은데..." 엄마는 자신의 다리를 걷어 보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의사는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고. 똑같이 일해도 어떤 분은 걸리지 않느냐 반문했다.


전신경화증(특발성 폐섬유증)을 진단받은 지 15년도 더 지났는데 엄마는 자신이 왜 이 병에 걸렸는지 아직도 궁금해하고 있었다. 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성 난치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세상에 그런 병도 있구나. 쉽게 받아들였다. 내 몸이 아니었으니까. 내 고통이 아니니까. 그럴 수 있었던 것 같다.


지쳐 곯아떨어진 엄마 얼굴. 경화증으로 단단하게 굳어진 얼굴 피부가 검고 얼룩얼룩하다. 이불 밖으로 나온 손은 딱딱하게 굽어지고 손가락 끝은 곪고 , 손톱 모양은 변형되었다. 깰까 조심스레 손을 잡아보는데 곱디고왔던 얼굴. 뭘 입어도 맵시가 나고 멋쟁이였던 엄마. 손톱에 색색의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던 젊은 날의 엄마가 떠올라 자꾸만 주룩주룩 눈물이 난다.


눈물을 훔치며 다짐한다. 올해를 만끽하기로. 엄마 심장과 내 심장을 자주 자주 포개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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