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울고 나면 괜찮아지나요

사랑의 힘

by 고라니

드디어 용인에 온 지 20일 만에 순천행 기차표를 예매했다. 예상치 못한 입원. 설날 연휴 이후 외래진료가 잡혀서 동생 집에서 20일 정도를 지내야 했다. 엄마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아서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다니면서 경과를 봐야 한다고 했다. 호흡기내과 의사가 폐가 전보다 많이 나빠졌고 섬유화 진행을 늦출 수 있는 비급여 약이 있는데 한 달에 150만 원이라 했다. 그동안은 3개월에 한 번씩 류마티스과만 진료를 보았었는데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호흡기내과도 같이 봐야 한다.


결과가 좋지 않을 거라는 예상도 했고 마음의 준비도 했지만 막상 의사에게 들으니 가슴이 턱 내려앉았다. 엄마는 70까지만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74까지 살았으니 됐다며. 약은 먹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도 약을 먹어보자고 말하지 못했다.


이기적이지만 엄마에게 얽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먼저 계산되었다. 한 달에 한 번 순천에서 서울까지 엄마를 모시고 병원을 다녀야 한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깝깝해졌다. 혼자 자유롭게 살던 내가 어쩌다 이리되었을까. 직장이라도 다니고 있었다면... 발뺌할 수 있는데. 내 삶은. 내 일상은. 답 없는 한숨만 흘러나왔고 동시에 자책하는 마음도 생겨났다. 책임이 겁난다. 나날이 안 좋아지는 엄마를 보며 살아야 하는 게 겁난다.


우울과 불안에 허덕이는 내 마음도 엉망인데, 엄마를 돌봐야 한다 생각하니 두렵고 막막하다. 나까지 시들시들 병들어 버릴까 봐 무섭다. 엄마는 나가서 살라고 말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 마음의 중심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내일은 그래도 순천에 간다. 한 달 뒤 일은 그때 생각하자. 잠이 쉬이 들지 않았다. 밖에서 조카, 올케, 동생이 레고를 하며 노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도 눈만 감고 있다 생각했는데 갑자기 엄마가 겁에 질린 듯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엄마를 흔들어 깨웠지만 엄마는 꿈속에 쉽사리 나오지 못했다. 엄마는 괴성을 지르다가 “미야. 미야.” 나를 절박하게 불렀다. 나를 부르기에 엄마가 꿈에서 깼다고 생각했지만, 엄마는 꿈속에 있었다. 엄마는 목청 껏 온 힘을 다해 절박하게 울부짖었다.


거실에서 놀던 조카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할머니 우는데요? 왜 우는 거예요? 들어가 볼까요?” 조카의 작은 손으로 톡톡톡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올케는 할머니가 꿈을 꾼 거라고 말하며 조카를 재우러 조카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엄마는 잠에서 깼고 나는 무슨 꿈을 꾸었는지 물어보았다.


“애기를 업고 있었는데, 니가 위에서 내 몸을 꽉 눌렀어. 아기가 숨 막히니까 그러지 말라고. 미야. 미야 불렀어.”


엄마에 대한 나의 압박감이 엄마에게 전달되기라도 한 걸까. 뜨끔했다. 엄마에게 미안해졌다. 그나저나 조카의 용기에 놀랐다. 나 같으면 할머니가 그런 소리를 내면 무서워서 도망갈 것 같은데 할머니한테 가보자니. 네 살 조카가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다음 날, 조카는 할머니 옆에 앉더니 묻는다.

“할머니 어제 꿈을 꾼 거예요?”

“응. 할머니가 무서운 꿈을 꿨어.”

“어떤 무서운 꿈인데요?”

“괴물이 할머니를 꽉 눌렀어.”

조카는 “괜찮아요.” 할머니를 안아주었다.


정말 믿기지 않는 꿈같은 장면이었다. 귀여워서 한 번 안아보려고 하면 “싫어요. 하지 마요.” 야무지게 자르는 조카인데 할머니에게 자신의 품을 내어준다. 금세 장난꾸러기 모드로 변신해 할머니가 잤던 방에 들어가 태권도를 하면서 괴물을 물리치느라 바쁘다.


올케와도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병원에서 안 좋은 이야기 들어서 악몽을 꾸신 것 같아요. 얼마나 무서우셨으면... (울먹) 그런 소리를 내실까요. 어머니 강해 보이지만 마음이 약하고 겁이 많으신 거 같아요. (눈물 줄줄) 꼭 안아드리고 싶었어요."


올케도 울고 나도 운다. 20여 일 함께 지내면서 마음이 가까워졌다. 올케는 어린 시절 이야기도 들려주고 힘들었을 때 썼던 글을 보여주기도 했다. 편지 쓰기를 좋아했었는데 요즘 부쩍 글짓기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말보다는 글로 마음을 표현하는 게 더 편안하다고 했다.


올케와 내가 처음 만났던 날, 올케는 정성스러운 손글씨가 적힌 르누아르 그림엽서 한 장을 건넸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도 엽서를 주었다. (앗!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답장하지 않은 무심함)


짐을 다 싸고 잠시 쉬다가 아름다운 장면을 목격했다. 냉장고 앞에 서 있는 엄마를 올케가 꼭 안고 있었다. 올케는 눈시울이 붉어져 훌쩍였고 엄마도 눈물을 닦았다. 둘을 보는데 나도 눈물이 흘렀다.


기차에서 세모 낳게 입을 벌리고 잠든 엄마. 입을 아무리 쩍 벌려도 입이 워낙 작아서 작은 새 마냥 귀엽다. 앞으로는 엄마가 꾸는 악몽을 모르는 척, 못 들은 척하는 대신 꼭 안아주면 될 것 같다. 조카와 올케에게 배워간다. 사랑은 용기구나. 나를 억누르던 부담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올케가 글짓기를 시작하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자문자답 질문 일기 365'와 최혜진 작가의 '명화가 내게 묻다'를 주문했다. 어벤저스 히어로를 좋아하는 조카를 위해서는 '슈퍼 거북', '슈퍼토끼', '슈퍼 히어로의 똥 닦는 법'을 주문했다. 내가 건 주문이 둘에게 통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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