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거절은 어떤가요

다정한 거절

by 고라니

저는 거절에 많이 서툰 사람이에요. 지금은 사회적 관계랄게 없어서 거절할 상황 자체가 없지만, 예전에는 거절해야 하는데... 하는데... 어쩔 줄 몰라하며 시간만 질질 끌며 전전긍긍대거나 정반대로 단칼에 제안을 끊어내 버렸죠.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던 것 같아요.


내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은 거절. 질질 끌기와 끊어내기. 거절의 두 방식밖에 몰랐던 저는 최근에 아주 다정한 거절을 맞이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지난달 공연에서 팬레터를 건넨 00이라고 합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카드와 조그만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요.

받을 곳을 알려주시면 보내드릴게요.


무진장 다짜고짜인 메시지. 며칠이 지나도 '읽음' 표시가 없길래, 메시지를 삭제하고(그랬던 것 같은데...) 페이지를 나와버렸다. 묵묵부답에 설레던 마음이 좀, 눅눅해졌다. 섣부른 행동 같아서 자책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끄러운 마음은 더 했다.


그에게 끌림이 있었다. 그가 만드는 노래, 연주는 특별했다. 그의 음악은 나의 영혼을 고양시켜 주었다. 이렇다 할 것 없는 일상에 그의 공연을 본 일은 중대한 사건으로 빵빵하게 부풀었다. 친해지고 싶었고,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고 싶었다.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몇 날 며칠 꾹꾹 누르다가 결국은 터뜨려버렸다.


오랜 시간 그의 음악은 들어왔지만, 작년 말에 처음으로 직접 공연하는 모습을 보았다. 순천에서 서울행 기차를 탔고 공연장 근처 카페에서 그에게 줄 카드도 썼다. 공연 본 뒤 "팬레터 썼어요."라고 말하며 그에게 카드를 건넸다. 그는 반갑게 웃으며 팬레터를 받아주었다. 급하게 쓴 터라, 두서없는 내용, 두고두고 아쉬운 마음은 있었다.


내 마음의 중심이 어느새 그에게로 옮겨가 있었다. 공연 다녀온 뒤, 공연장에서 녹음해 온 곡을 반복해서 들었고 틈만 나면 그의 음악을 들었다. 들어도 들어도 좋았다.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 그의 공연 영상에 내 뒤통수가 단정하고 반듯하게 나와 마음에 들었다. 보고 또 보았다. 내 뒤통수를


심지어 그가 번역한 두꺼운 책도 밑줄 그어가며 정말 열심히 집중해서 읽었다. 좋은 책을 순조롭고 아름답게 번역한 그의 실력에도 반해버렸다. 혼자서 자꾸만 마음을 키워갔다. 그러지 않으려 했는데 또 그러고 말았다. 혼자... 아마, 이러다가 또 말 것이다. 그동안의 패턴대로라면...


시간이 지나자 그에게 각별한 존재로 보이고 싶었던 마음이 정신을 차렸다. 씁쓸했지만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앞으로는 팬레터도 메시지도 보내지 말자. 만약, 보낸다면 나는 또다시 단순 팬심이 아닌 연필심(흑심)에 가까운 복잡한 마음이 되어있을 게 빤했다. 혼자서 실망하고 기대하는 일이 되풀이될 것이다. 마음의 동요를 허하고 싶지 않다. 혼자 키워 놓은 마음과 좁혀버린 거리를 다시 조절해야 한다. 그저 팬팬팬 팬으로 돌아가기. 팬으로서 앨범을 사고, 음악을 듣자. 나를 좀 봐달라고 안달하는 건 아주 꼴불견이다.


그에게 부담과 불편을 줄 수 있는 행동은 아예 금물. 명상하며 조용히 지내보자. 공연장 가기도 다소 민망하니, 얼마간은 참아보자. 그를 향해 질주하던 마음을 돌아 세우고, 물을 멕였다. 좀 쉬자. 마음을 추슬렀다. 맞춤 맞게 그가 번역한 책도 다 읽었다. 그가 번역하지 않았다면, 과연 내가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을까. 유독 이 단어가 남는다 '점진적으로...' 서둘러 누군가와 무엇의 관계가 될 필요는 없다.


장 봐서 집에 돌아가던 길에 그의 메시지를 받았다. 처음엔, 바로 그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헛것을 본 마냥 눈을 의심했다. 그에게서 메시지가 온 자체만으로도 마냥 반갑고 기분 좋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메시지의 맥락이 읽혔고 나는 꽤, 괜찮은 다정한 거절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어떤 거절을 해왔나. 긴장, 정색, 차가움, 말 돌리기, 무반응, 헛웃음 등... 피하려는 감정과 온도로 대충대충 거절을 해왔던 것 같다. 거절이 아닌 척하며 제대로 거절하기를 숨기고 피해왔던 것이다. 내가 거절하는 태도가 그러했으니 거절이 두려워 타인에게 먼저 말걸지도, 손 내밀지 못했다. 거절하는 상황이 오면 무리를 자주 했고 마음을 감추는데 급급했다. 그래서 마음 한 구석이 늘 불편하고 찜찜했다.


놀랍게도 그에게서 받은 메시지 덕분에, 그동안 '메시지 괜히 보냈어.' '날 머저리로 생각할 거야?' '내가 너무 싫다.' '또 이러고 말았어. 정말 지긋지긋해' 등 자책과 후회로 들쑤셔댔던 마음이 잔잔해졌다. 자책과 후회 대신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토닥토닥 지펴졌다. '너무 몰아붙이지 않아도 괜찮아. 관심 가는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잖아.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었어.'


이전 메시지는 공연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제가 참으로 호기로웠던 것 같아요.

새 앨범, 귀 기울여 들을게요!

00 님도 건강하게,

포근포근한 겨울 보내세요~


메시지 서론에 (메시지 보낸 이유에 대해) 핑계 대는 찌질함이 좀 묻어있지만 이 정도면, 무난한 것 같다. '조만간 또 좋은 기회에 뵐게요' 그의 마지막 문장 덕분에 조만간 공연을 다시 보러 갈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전처럼 맨 앞자리는 못 앉겠지만...


공연을 본 그날 저녁, 무척 추웠는데 온통 그의 연주와 노래로 휘감겨서 이불속 마냥 포근했다. 마음속 어딘가, 있는 줄도 몰랐던 옹달샘에서 물이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옹달샘의 발견이 너무 좋아서 방방 들떴다. 가만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소리치고 싶었다.


"나에게도, 옹달샘이 있어요!"

"곧 토끼가 올 거예요!"

오지 않은 토끼를 두고 마음이 너무 앞섰다. 친해지고 싶었다.


서로와 무관하게 살아온 타인이 우연히 생긴 만남의 기회로 교류가 생기기를... 연결되기를 바란다. 그럴 때, 편지가 생각난다. 서툴더라도 뭐라도 적어 보내고 싶다. 그냥 넘기기에는 뭔가 아쉽다. 내 마음 알아주기.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부담이 되고 다소 일방적일 수 있지만, 최대한 그러지 않도록 살피며 앞으로도 편지를 시도하고 싶다. 자칫하다가는 잃어버리고 잊어버릴 수 있기에 간당간당일지라도 편지를 이어가면서 살고 싶다. 편지 수신인이 누구든 편지 보내는 마음은 같다.


당신을 만나서 반가워요.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앞으로도 잘 지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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