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가 시작되다
당신에게 여행은 어떻게 시작되나요? 여행을 큰 일이라고 생각하면 못 떠날 때가 많아서 저는 작은 일로 생각하려고 해요. 무계획으로는 발길이 안 떨어지고 떠나지 일정이 1박 2일만 되어도 숙소 검색하다 지쳐서 여행을 포기합니다. 이런 저에게 전주로의 당일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순천역에서 출발해 한 시간 기차를 타고 전주로 영화 보러 가는 장면을 상상한다. 갈 때 하나, 올 때 하나. 겨울엔 귤 두 개만 있으면 기차여행의 낭만을 즐길 수 있다. 스크린 앞에서 손수건을 쥐고 영화 시작을 기다리는 내가 보인다. 쉽고 빠르게 상상이 되어서 바로 기분 전환이 된다. 그러다 제법 진지하게 실행에 옮기고 싶은 영화가 나오면, 전주행 기차시간을 검색한다. 영화 시작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 정도까지가 적당하다. 영화가 대략 5시 정도에는 끝나야 집에 9시 전에 도착할 수 있다. 영화시간과 기차시간을 따져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에서 돌아온 듯 기분 좋은 피로가 몰려든다.
어젯밤에도 영화를 검색했다. 15시 30분 영화니까 12시 39분 기차를 타고 전주로 출발해서 순천으로 돌아오는 건 18시 42분. 집에 도착하면 대략 20시 30분이다. 딱 좋은 영화 여행 스케줄이다. 떠날 수 있을까? 예고편 배우들의 연기가 끌리는데... 결국 결론 내지 못하고 아침을 맞이했다.
갈까 와 말까 사이. 망설임을 잠재우기 위해 명상 방석을 만들기로 했다. 명상 방석을 한 땀 한 땀 꿰매는데도 마음이 차분해지기는커녕 여행 떠나기 직전의 동요로 들떴다. 이제 창구멍만 꿰매면 명상 방석은 완성이었다. 어느 틈에 망설임이 사라지고 출발하자는 신호가 강력하게 왔다. 현재 시각 11시 40분. 12시 39분 기차니까 지금 준비해도 여유롭다. 영하권의 매서운 날씨라고 했지만 볕이 좋았다.
"엄마, 갑자기 친구랑 점심 약속이 생겨서 나갔다 올게요. 저녁에도 늦을지 몰라요."
갑자기 생긴 약속인양 헐레벌떡 집을 나섰다. 어제저녁의 목욕이 오늘 출발을 위한 준비처럼.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보러 전주에 간다. 귤 두 개와 함께. 누가 이 내막을 안다면 영화에 푹 빠진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영화를 좋아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그저 떠날 수 있는 감각을 잃고 싶지 않다. 여행을 가서 어디 가서 무얼 하고 무얼 먹고 무얼 보고... 생각만으로도 복잡해지고 그러면 떠나기 귀찮아진다. 그렇게 너무 오랜 시간 방에만 있었다. 영화 보러 가는 여행. 무계획으로도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나는 '기차 타고, 영화 한 편 보고 오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꽤나 단순해진다. 떠날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찾았다.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우르르 탄다. 그중 한 분이 나를 보며 "몇 번이세요?" 내 자리는 49번인데 46번에 앉아있었다. 종종 하는 실수다. 엉뚱하게 남의 자리에 앉아 있는 일. 반복되니, 두려워지려고 한다. 마흔 중반, 치매가 오나... 죄송하다는 말도 잊고 엉거주춤 고개를 주억대며 외투를 집어 들고 자리를 옮긴다. 민망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전주 도착 방송이 나온다. 오늘 볼 영화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이다.
좀 밋밋하게 느껴지더라도 '사랑은 낙엽을 타고'보다 원제 'Fallen Leaves'가 더 마음에 든다. 영화 내용을대충 간추려본다. 여주인공 '안사'와 남주인공 '홀라파'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둘의 사랑은 술 때문에 위기를 맞게 되고 이별을 한다. '안사'는 안락사 위험에 처한 개를 돌보며 지낸다. 급작스런 사고로 의식 없이 병원에 누워있게 된 홀라파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그녀는는 홀라파도 돌본다. 그에게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함께 있는다. 다행히 홀라파는 의식을 되찾고 둘의 사랑은 다시 시작된다. 그녀는 사랑을 지켜낸다. 해피엔딩이 분명한데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한 켠이 시렸다. 며칠이 지나서야 마음 시림의 정체가 드러났다.
나는 안사처럼 그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프리랜서 카메라 맨이었던 그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놀러 가기로 한 날 얼굴을 덮는 마스크를 쓰고 나타났다. 그는 얼굴을 다친 이유를 끝내 말하지 않았다. 목적지로 향하던 중 턱 아래로 진물이 뚝뚝 떨어졌다. 너무 놀라서 병원부터 가자고 소리 질렀으나 그는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얼굴이 회복되어 갈 때쯤, 그는 내가 사준 복숭아를 먹고 앞니가 부러져서 나타났다. 그가 나를 만나서 점점 망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더 만나면 불길한 사건이 계속 생길 것 같았다. 이별을 고하고 시간이 지나자, 솔직한 감정이 몰려와 자책감에 시달렸다. 그를 위해 헤어지는 거라고 결정했지만, 희망 없는 관계라고 낙담하고 도망친 거였다. 앞이 보이지 않았고 그와 나 사이에는 빛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한참만에 알았다. 두려움과 불안에 휩쓸려서 그를 좋아하는 진짜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눌러 꺼버렸다는 것을. 비겁했고 지켜내지 못했다. 그는 내가 오랜 시간 짝사랑 했던 이였다.
안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할 일과 할 말을 한다. 여의치 않은 상황일지라도 맞서고 피하지 않는다. 꿋꿋하고 당당하다. 훌리파를 집으로 초대한 날, 그녀는 마트에서 둥근 접시 하나, 포크와 나이프를 산다. 이때 눈물이 찔끔 났다. 안사의 움직임과 미세한 표정에서 행복이 전달되었다. 그런 영화가 있다. 볼 때는 잘 모르다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계속 떠오르는. 그러다 친구가 되는. 안사와 홀라파가 그랬다.
3호차 41번, 3호차 41번, 몇 번을 되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 밖이 캄캄하고 눈은 피로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두 글자가 따라왔다. '노안' 나 이제 노안이 시작되었나 봐. 노안을 몸소 확인했다. 안경을 끼고 꽤 앞자리였는데도 자막이 흐릿했다.
어떤 국화꽃은 축 늘어진 채로 얼어붙었고, 아직 시들지 않은 꽃은 보드라웠던 오늘. 뒷산에 오르면 발에 밟히는 게 낙엽이다. 바스러지고 흙이 되어가는 낙엽은 초록의 반짝임은 아니지만, 제 나름의 빛으로 빛난다는 것을 본다. 떠나길 잘했다. 엄마한테는 솔직하게 영화 보고 왔다고 털어놓았다. "챠~암나" 혼자서 전주까지 가서 영화 보고 온 나를 혀를 차며 한심하게 바라보지만, 그 눈빛에서도 나는 빛나는 사랑을 읽어낸다.
저는 전주로 영화 보러 가는 여행을 시작했어요. 그러고 보니 영화와 여행은 닮았네요. 어떤 장소와 사람 그리고 이야기가 펼쳐지잖아요. 저의 '영화 여행은 무궁화호를 타고' 계속될 거예요. 당신에게는 여행이 어떻게 시작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