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라니 Mar 03. 2024

제4의 벽_박신양

선사 예술 이야기와 만나다

  희망도서가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았지만 대출 정지 상태여서 빌릴 수 없었다. '제발, 하루 이틀 사이에 누군가가 이 책을 빌려가지 않기를...'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졌다. 집에서 도서관까지 거의 경보 수준으로 걸어갔고 책을 쥐었다. 프롤로그에 쓰인 문장부터 박신양의 '제4의 벽'에 완전히 포획당했다. 


  표현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고립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만나고 싶다. 

  -박신양, 제4의 벽, 민음사, 5p

   

  '구석기인들의 꿈'이라는 부분을 읽어나가다 작년에 짧게 메모해 두었던 장을 펼쳤다. 이렇게 '제4의 벽'과 '선사 예술 이야기'는 급작스럽게 만났다.     


ㅣ선사 예술 이야기, 장클로트, 열화당 

 

  이 책을 발견한 순간, 동굴탐사 현장에 가 있는 듯했다. 책을 빌릴까... 말까... 하는 마음으로 훑는 와중에 들어온 문장들이 매력적이라서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겠다 싶었다. 


선사 예술이건 현대 예술이건 우리 모두가 전율하며 공감하는 예술이 있다면, 이런 감출 수 없는 에너지가 고여 있기 때문일테다.

바위 자체가 그림을 거부할 수도 있는 걸까. 그는 웃으며 맞다고, 바로 그거라고 했다.

새겨질 것인지 또는 그려질 것인지는 암면이 수락하느냐에 달렸다고 했다. 그러려면 긴 명상을 하며 바위와 일종의 영적 교감을 나누어야 했다. 


-장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열화당


  그런데, 읽어나가는 동안 뭐랄까 맥이 잡히지 않았다. 동굴벽화를 두고 언저리만 탐색하는 기분.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읽지 못하고 후룩후룩 건너뛰며 끝내버렸다. 이렇게 독서를 하게 되면 좀 찜찜하다. 책에게, 작가에게 미안하다. 다만, 몇 가지는 곰곰이 생각해보고 싶다.  

 

  그들은 왜 동굴에 그림을 그리거나, 새겼을까? 


  그들에서 '나'로 질문의 주체를 옮겨와 본다. 나는 왜 어린 시절 '동굴'과 같은 숨은 장소를 찾아다녔을까? 그런 장소를 발견했을 때 무엇을 했나? 


  어린 시절, 숨은 장소를 발견하면 아지트라고 불렀다. '물땅꼬'라고 불리던 곳이 있었는데 천장이 트인 시멘트 건물 4개의 벽면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동산에 버려진 폐허 같은 분위기였지만, 우리에게는 아지트로 손색없었다. 동네 아이들은 어떻게 그곳을 알아냈을까. 약속 없이도 아지트에 곧잘 모였다. 남녀, 학년 구분 없이 뒤섞여 놀았다. 혼자 놀기도 하고 같이 놀기도 했다. 

  

  무척이나 자유로웠다. 해골 그림을 벽면에 그리는 아이, 해골 그림을 무서워하는 아이, 의자나 인형, 장난감 등 살림살이를 가져와 공간을 꾸미는 아이. 낮잠을 자는 아이. 어른과 숙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뭘 해도 괜찮은 비밀 장소였다. 해골 그림은 다음날 가보면 지워져있기도 했다. 누가 지웠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계획적으로 했다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던 같다. 비밀스러우면서도 열린 곳이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그들은 왜 동굴에 그림을 그렸을까. 

  

  수렵, 채집, 사냥을 하다가 우연히 동굴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 내가 여기 있다는 흔적을 남겨 놓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모호한 비밀스러운 공간. 그 공간과 잠시라도 온전히 일체, 합일되고 싶은 욕망으로 그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내 경우) 림은 어떤 때 그려지나? 

  대상을 관찰하고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그 순간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을 때, 오래 간직한 기억이나 감정이 사라지지 않고 마음 안에 담겨 있을 때, 그림을 잘 그리고 싶을 때. 정도다.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 없었을 때라면, 자신이 되고 싶은, 정복하고 싶은, 알고 싶은 호기심의 대상은 살아있는 동물에 집중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전 나의 기록은 여기까지다. 나는 왜 그들이 동굴에 벽화를 그렸을지에 집중했다. 왜 소를 그렸을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저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동물을 그렸을 것이라고 뭉뚱그렸다.


  박신양 '제4의 벽'에서 동굴벽화에 소가 그려진 이유에 대해 상상한 부분은 인상적이었다. 나에게 다른 관점을 보여주었다.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한 시기였다면 그들 중에 누군가는 영혼의 친구인 소를 죽이는 행위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있지 않았을까? 사냥을 위해서는 용감해져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이런 사람들이 동굴에 남겨지거나 갇혀서 그림을 그리게 된 건 아닐까? 


(...) 내가 상상하는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대부분 미술사가들의 설명 가운데는 감정이나 그리움 같은 개념은 전혀 없어 보인다. 나는 구석기인들이 소를 위대하고 아름답다고 여겨서 그렸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림에서 그리움을 발견한다. 


 -박신양, 제4의 벽, p35~37       

  

  그는 너무 그리워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다. 러시아 연극학교 유학시절 친구 키릴과 유리 미하일로비치 압샤로프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매일 밤을 새워 그렸다 한다. 동굴벽화의 소에서도 그는 '그리움'을 발견한다. 뭉클한 상상이고 발견이다. 


  동굴벽화를 검색해 감상해 본다. 쭉 보니, 화살에 맞은 소들인데도 참 역동적이다. 움직임이 춤 같다. 벽화 속 소들을 보다가 문득 든 생각. 그들은 죽음 직전의 소를 그려둔 것이 아닐까? 사냥으로 죽어가는 소를 본 장면은 너무도 강렬해서 쉽게 잊히지 않았을 것 같다. 생명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순간과 움직임. 정리하자면 대상의 삶과 죽음 경계를 목격했기 때문에 그려진 것이 아닐까. 


  3년 전, 엄마와 아빠를 매일 같이 그렸다. 돌아가시기 전에 많이 보고, 그려두고 싶었다. 보고 싶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때는 부모님의 죽음이 늘 염두되었다.  


  쓰다 보니, '그리워서 그림을 그렸다'는 박신양의 말이 진심으로 와닿는다. 계속해서 '제4의 벽'을 찬찬히 읽어나가고 싶다. 또 무엇과 만날지 궁금해진다. 


  그나저나, 나는 지금 왜, '제4의 벽'을 읽고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희망이 다가온 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