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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 이야기

by 일상 여행자

# 엄마와 피자


“피자로구나.”

시내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막 구워 나온 피자를 들고 본가로 내달린 날이었다. 화덕의 온기가 박스 포장지에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평소 뭐 하러 사 들고 왔냐는 핀잔 듣기가 일쑤인데 피자는 못 이기는 척 엄마 손에 반갑게 맞아졌다. 아토피로 밀가루가 식단에서 물러난 지 오래지만 피자만큼은 예외였다. 삼시 세끼 밥 외에는 간식이나 주전부리를 하지 않는 엄마가 피자를 좋아하시는 건 솔직히 의외이긴 했다.

“식기 전에 드세요.”

차려놓은 저녁밥을 물리친 피자 한 조각을 맛있게 잡수셨다.

“너희가 사 오는 피자는 치즈도 많고 얹히는 것도 푸짐 허니 맛있네.”

엄마의 감탄 어린 피자 평에는 씁쓸한 사연이 배어있다. 어느 해 도통 먹고 싶은 게 없고 입맛을 잃은 엄마의 머릿속에 떠오른 게 피자였단다. 당신이 먹고 싶어 뭔가를 직접 사러 간 적이 없던 엄마였다. 호기롭게 읍내 피자가게 메뉴판 앞에 선 엄마는 지난한 피자 주문의 난관에 봉착했다. 도우 두께를 고르는 것부터 읊을 수도 없는 치즈 종류와 모르는 것 투성이인 토핑까지 알아듣지 못하는 식재료 한마당이었다.

그러나 당황스러운 피자 고르기는 대충 사진을 짚어가며 어찌어찌 주문한 피자가 나왔을 때의 황당함에 비하면 양반이었단다. 당신이 그렸던 피자와는 한참 거리가 먼 볼품없는 부침개 한 장이 떡하니 나왔던 거였다. 얇은 도우에 습자지 한 꺼풀 끼얹은 것 같은 치즈와 쪼그라든 토핑이 어찌나 빈약해 보이던지 주인이 속여먹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고 했다.

“시골 촌아줌마가 뭘 알겠나 싶었는지 주문한 피자가 너희랑 먹던 거랑 영 딴판이더라”시던 그 피자 때문에 엄마는 집 나간 입맛을 찾으러 갔다가 서글픈 배신감만 안고 돌아오셨단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치즈가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두툼한 피자를 먹을 때마다 엄마의 읍내 피자가 겹쳐 떠올랐다. 서울역 근처의 프랜차이즈 피자를 사서 KTX 피자 배달부로 귀향하기도 하고, 아쉬운 대로 토르티야 위에 채소들과 모차렐라 피자를 흩뿌려 흉내만 낸 수제 피자를 구워 드리기도 했다.


# 최초의 ‘피자성’

지방 중소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의 첫 피자는 수제 피자였다. 시장 튀김 닭과는 차별화된 맛으로 우후죽순 생겨나던 치킨집이 외식업계를 평정하던 시절이었다. 국내 햄버거 체인점이 유일한 패스트푸드였고, 대도시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는 프랜차이즈 피자가 진출하기 전이었다. 친구들과 용돈을 모아 들락이던 즉석 떡볶이가 제 나름의 사치였던 고등학생이 피자를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선보인 첫 피자는 정월 대보름 달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경양식 돈가스집에 가는 만큼의 용기를 내어 시내에서 유일한 피자집이었던 ‘피자성’에서 포장해 간 날이었다.

“이게 뭐꼬?”

“피자예요. 말하자면, 이탈리아 부침개 같은 거예요.”

아버지와 엄마가 한 조각씩 먼저 집어 드시고, 동생들이 낯선 먹거리에 호기심을 품고 시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입을 채 맛보기도 전에 막내가 먹던 피자 조각을 뱉어냈다.

“빵이 상한 것 같애.”

“그럴 리가, 막 만들어서 가져온 건데.”

“그래, 뭔가 좀 이상한 맛이 난다.”

한 마디씩 거들자 각자 속으로만 품고 있던 거슬리던 맛에 대한 평을 앞다퉈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야심 찬 먹거리로 선보였던 나의 피자는 구한말 쇄국 앞의 서양문물처럼 가족들에게 일제히 거부당했다.

그날 수제 피자의 실패담을 되짚어보자면 한국인의 입맛에 맞춰지지 않은 정통 이탈리아 피자였다는 거였다. 현지화가 되지 않은 본고장의 수제 피자는 이미 망하기에 충분한 기본값을 갖추고 있었다. 치즈에 익숙지 않은 토종 입맛이 소화하기엔 쉽지 않은 본연의 맛에 충실한 치즈와 얇은 도우에 토핑이라고는 고작 블랙 올리브 정도였다. 비주얼로도 더없이 심플한 수제 피자가 푸짐한 맛이 있을 리 없었고, 치즈는 고사하고 우유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유당불내증 가족에게 환영받을 리는 만무했다. 어쨌든 고급 상자에 빨간 리본으로 정성스럽게 싸맨 수제 피자는 그대로 방치되었고, 혼자서 며칠에 걸쳐 꾸역꾸역 먹어치웠다.


이후 토종 프랜차이즈가 유일한 수제 피자집 자리를 꿰차게 되면서 나만의 ‘피자성’은 소리 소문도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상가 한 자리는 구색인 마냥 자리 잡는 피자집만큼 이제 피자는 대중적인 외식 메뉴로 거듭났다. 그날의 씬 피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고기, 고구마, 해산물 등 푸짐한 토핑들을 다양하게 골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피자를 내뱉던 막내도 다채로운 종류 중에서 능숙하게 원하는 메뉴를 주문하게 되었고, 입맛에 맞는 치즈를 골라 늘어뜨리는 맛을 즐기게 되었다.

이제는 전집보다 더 흔해진 피자가게를 지나칠 때면 첫 피자에 대한 기억이 씁쓸하게 떠오른다. 불모의 황야에 첫발을 내딛던 서부의 개척자가 비옥한 도시로 거듭난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듯이, 라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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