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계탕
오래도록 마음으로만 품어온 열망을 마침내 실현할 기회가 찾아왔다. 전공실습을 지원해야 하는 대학 3년 차였다. 자원 봉사하던 문화원 선생님께서 잡지편집자로 근무하셨던 강릉의 영유아보호시설을 실습지로 정했다. 굳이 먼 강원도까지 가지 않더라도 실습할 수 있는 사회복지 기관은 인근에 충분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비슷한 가정배경을 가진 단짝과 나는 집과 학교의 쳇바퀴를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로 의기투합했다. 그렇게 여름 한 달 동안 강릉의 사회복지 시설 실습생으로 지내게 되었다.
사회복지사와 보육교사의 업무를 보조하며 이론으로 접했던 복지기관의 활동을 직접 체험하는 기간. 학기나 방학 중에 짬짬이 하던 아르바이트나 자원봉사활동과 특별히 다를 것 없는 실습이라고 가볍게 여겼다. 지금 돌아보면 그렇게 달랑 아는 한 사람의 연고밖에 없는 강릉을 용감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십 대 청춘의 용감함과 한 번도 객지를 겪어본 적 없는 우리의 태생적인 한계가 당당히 한몫을 차지했던 것 같다.
영유아보육시설의 층위는 지층처럼 견고하였다. 신생아에서부터 취학 전 영유아와 중학생에 이르는 아이들과 함께 부대끼는 시간 이후에도 출퇴근하는 사회복지사와 조리사, 사무직원과 24시간 상주하는 보육교사들 틈에서 하루가 온전히 시설 내로 제한되었다. 신세계를 찾아 강릉까지 떠나온 나에게 놓인 세상은 아동보육시설이라는 새로운 울타리에 갇힌 것 같았다. 미혼의 보육교사들이 탄수화물 군것질로 양육 스트레스를 해소할 때 두 실습생은 자유를 잃은 야생마처럼 시들해져 갔다. 단짝이 감기에 걸리면 다음 날은 내가 몸살로 배턴을 이어받았다. 객지의 낯섦을 온몸으로 앓았던 여름이었다.
비교적 넉넉한 복지재단이었기에 지난해 크리스마스 협찬들로 생필품과 학용품이 쌓여 있었고, 일 년 치 간식을 쟁여놓고 나눠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시설 내 공연장에서 영화나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공부방과 여름 캠프 등의 지원 활동도 다채롭게 이뤄지고 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영양이나 생활 수준은 일반 가정 이상으로 풍족한 시설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표정에 드리운 그늘은 종종 어두워졌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결핍이 얼굴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부모와 가족으로부터 버려진 상처와 불안을 헤쳐온 아이들은 어리광도 눈치 보아가며 부렸으며 호감과 비호감을 판단하는 데에도 여느 장사꾼 못지않게 능란했다. 영리함을 넘어선 영악으로 터득한 아이들의 생존력은 때로 어른마저 당황스럽게 했다.
그해 여름 강릉의 열대야는 뉴스에 오르내릴 만큼 유난했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에서는 희생자의 생사가 연일 중계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일상이 그토록 간절했던 적이 없었다.
한 달 실습기간 중 휴가가 주어진 어느 날이었다. 두 실습생은 허락된 하루를 사막에서 ‘마침내 도달한’ 오아시스처럼 만끽했다. 허름한 시내 영화관에서 본 영화 제목도 강릉대학교 구내식당의 메뉴도 기억 언저리에서 아스라해졌지만, 자전거 위에서 함께 달리던 바람의 감촉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날 홍길동의 아버지처럼 거리를 유지하던 선생님께서 바깥 식당으로 우리를 불러내셨다. 시설에 머무르던 한 달 동안 우리가 겪은 우여곡절만큼 소개해준 입장 탓에 내색하지 못했던 나름의 고충이 있으셨으리라.
가만히 있어도 땀이 저절로 흐르는 무더운 한낮. 뚝배기에서 펄펄 끓고 있는 삼계탕이 나왔다. 한가운데 다소곳이 엎드려 있는 어린 닭의 등을 갈라 우리 앞으로 안겨 주셨다. 아이들 밥을 챙겨주느라 경황없이 때우던 실습생의 나날 속에서 집 떠나온 이후 차려주는 밥상도 온전히 내 몫의 한 그릇을 받아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복날 폭염 한가운데서 들이켰던 삼계탕은 눈물겹게 뜨거웠다. 국물이 그대로 솟는 듯한 땀을 흘리며 뚝배기를 비우고 나니 음식으로 채워지는 보양식의 의미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어른들이 말하는 속이 시원해지는 뜨거운 맛이 한 그릇으로 이해되었다.
실습을 마치고 나는 겪어보지도 않은, 군대를 제대하는 예비역의 각오를 다지며 새로운 세상 속으로 돌아왔다. 그 여름의 한 달은 평범한 가정의 울타리와 소박한 저녁 밥상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숙성의 시간이 되었다. 이후에도 복날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때마다 맛과 영양을 따져가며 여러 보양식을 챙겼다. 그러나 그날의 폭염만큼이나 몸과 마음을 오롯이 채웠던 뜨거운 국물은 드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