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쓰는가
희뿌옇게 밝아오는 아침이 야속하게도 밤새 긁적인 글은 형편없었다. 대학방송국 동아리에서 방송원고를 붙들고 씨름하던 이십 대 내 글의 무게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선배들의 묵직한 문장에 비해 빈약했고 상대적으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일상의 틈새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도타운 연륜을 갖춘 돋보기를 장착하지도 못했다. 소소한 소재들을 그럴듯하게 포장할 감각적인 재간 또한 만무했다.
그때까지 제대로 된 글을 써 본 적도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자연히 아무리 쥐어짜도 너무나 실망스러운 글밖에 써내지 못하는 내 글쓰기는 청춘의 많은 가능성 속에서 내 재능 밖으로 밀려났다. 글로 쓸만한 삶이 아직 쌓이지 않았다는 게 스무 살의 내가 내린 글쓰기의 결론이었다.
그러다 졸업 무렵 밥벌이를 위한 직업적인 글쓰기에 들어서면서 보다 치열해졌다. 사적인 글이 아닌 공익을 위한 지면에 기명으로 올려지는 기사는 많은 책임을 요구했다. 일주일 내내 발품과 손품을 바친 짧은 글은 가차 없이 편집되기 일쑤였고, 새빨갛게 도배된 교정지를 표백하기 위해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시간에 쫓긴 마감을 마치고 나서도 맡은 지면이 빈 여백으로 나오는 신문이나 잡지를 받아 드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이름 석 자가 박힌 인쇄물로 남는 일의 보람은 끝나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다른 일들에 비해 남달랐다. 어쨌든 정해진 틀 안에 끼워 맞춰야 하는 강박 속에서 쫓기는 마감의 압박을 넘어서면 조금씩 번듯한 글이 지면으로 인쇄되어 나왔으니까.
모두가 뜯어말리던 요식업에서 보란 듯이 실패하고 돌아온 이후 내 글의 무게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사이 나는 많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되었고 그토록 쌓이기를 바랐던 연륜이라는 게 글에 살포시 얹혀 있었다. 하찮게 내팽개쳤던 글쓰기를 더없이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돌아온 탕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허튼 것 하나 없는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고 저마다 품고 있는 삶의 무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 같았다. 그러나 직업적인 글쓰기가 아닌 일상 속에서 글을 쓴다는 건 많은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는 일이었다. 글을 쓰기 위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데에 지레 기운을 소진하는 상황이 부지기수였다. 지속적인 글쓰기로 단련하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와 보다 절실한 동기가 필요했다.
수필교실 강의 첫날 이제 막 등단했다는 회원의 낭독을 듣다가 울컥 마음이 솟아올랐다. 어떤 뛰어난 작가의 미문으로도 풀어낼 수 없는 소박하고 따스한 마음이 깃들어 있는 글이었다. 삶이 묻어나는 글, 그 사람이 고스란히 담긴 진솔한 글 그 자체였다. 내 감정과 의견을 배제해야 했던 기사가 아닌 나를 온전히 갈아 넣어야 하는 ‘수필’이었음을 깨닫던 순간이었다.
일단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데 ‘아차’ 싶은 내 뒤통수를 훌쩍 뛰어넘어 합평 시간에 쏟아져 나오는 글들은 실로 용감무쌍했다. 못다 한 그리움을 토로하는 카타르시스의 시간인가 하면 지난 생의 억울함을 성토하는 치유의 장이 펼쳐지기도 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아야 할 엄마의 새끼손가락 맛을 그려내고 싶었다. 아버지의 굽고 마디진 손에 깃든 고귀한 노동의 가치를 써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저마다의 삶에 깃든 이야기와 관찰한 풍경 속에 숨은 아름다운 리듬을 표현해 낼 수 있기를 바란다. 뛰어난 미문이 아니라고 좌절하지도 않고 그저 내가 써낼 수 있을 만큼의 글을. 그 속에서 조금씩 성숙하고 되돌아볼 줄 아는 아량이 갖춰지면 더없이 좋은 쓰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