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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어진 듯 여겨지는 것들에 대하여

<구룡성채: 무법지대>와 <월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

by 레트너 Jan 24. 2025


브런치 글 이미지 1



1.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대개 홍콩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싶다. 80~90년대 홍콩영화에 심취했던 경험이 있는 경우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본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최근 홍콩을 다녀온 바 각종 매체에서 홍콩을 접하는 일이 생기면(이를테면 나 혼자 산다나 톡파원 25시 등) 그리움은 짙어진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게으름을 타파하자는 신년의 마음가짐과 근래의 경향을 파악하여 동시대 감각에 뒤쳐지지 않고자 하는 발버둥으로 각종 영화제나 평론가 리스트에 있는 작품을 찾아본다.(보통은 작심한달에 불과하지만) 그 과정의 일환으로 매년 찾아보는 것이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 인데 몹시 흥미로워 보이는 영화가 있어서 챙겨봤다. 장 바오루이 감독의 <구룡성채: 무법지대>(九龍城寨之圍城 / Twilight of the Warriors: Walled In)(2024) 라는 작품이었다. 앞서 홍콩에 대한 어떤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밝힌 바, 해당 작품에 관심이 모아진 것은 매우 개연적인 수순이었다.



재미있었다. 영화가 좋았다. 특히 액션 시퀀스의 연출은 말 그대로 교과서 였는데, 과거 홍콩 액션 영화(70대가 된 홍금보 배우의 액션을 잠시 나마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황홀하다)의 향수를 자극하는 것은 물론이고 동시대적인 세련도 갖추고 있었다. 액션 시퀀스를 언젠가 연출하게 되면 레퍼런스 삼아야 겠다 싶은 작품들이 몇 가지 있는데(이를 테면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 같은), <구룡성채> 역시 그 항목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찌르는 자와 방어하는 자의 앵글과 액션의 변주, 클로즈 업의 구성이 짜임새 있는 무용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공간과 액션의 인과적인 합치도 훌륭했다.



온통 남자 캐릭터만 우르르 나와서 의리를 주창하고 낙후한 뒷골목 배경으로 폼을 잡는 양태가 지나치게 한 쪽으로 쏠려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이 작품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자>를 떠오르게 하는 부분이 일면 존재한다. 장르적 판타지의 자기반영적 특질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다. 더불어 지금은 왜 이러한 판타지가 동시대성을 획득하기 어려운지를 드러내며, 그 이유 속에 숨어 있는 사회적 모순에 대해 살포시 이야기하고 있다. 다소 인상적으로 말하자면 철지난 것처럼 여겨지는 영화적 설정과 아이콘들을 통해 지금 사라진 것이 무엇인지를 진단하고, 그 가치에 대해 재고하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구룡성채>가 담고 있는 이와 같은 담론의 지점들은 영화 장르의 학술적 차원에서 충분히 높은 가치를 획득하고 있는 사안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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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월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 Wallace & Gromit: Vengeance Most Fowl>(2024)의 경우도 홍콩영화와 그로부터 촉발된 향수, 아니 그 보다 더 강하게 사무치는 그리움에 많은 이들을 몸서리 치게 만들 작품이다. 해외 애니메이션이나 디즈니(도날드 덕에서 <라이온 킹>까지), 팀 버튼(<크리스마스의 악몽>) 류에 유소년기를 저당잡힌 이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어린시절 KBS '세계의 베스트'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접했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달의 표면을 치즈처럼 잘라먹고, 로보트가 우주선 문짝으로 스키를 타는 장면, 그로밋이 장난감 기차 선로를 놓는 장면을 본 것은 인격 형성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월레스와 그로밋> 시리즈를 2020년대에도 볼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다.



<월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는 여전히 그 때 그 아드만 스튜디오의 정서를 담고 있는 작품이었다. 비록 넷플릭스를 통해서 공개가 되거나 월레스의 목소리를 담당하셨던 피터 살레스가 세상을 떠나 캐릭터 음성이 바뀌는 등의 변화가 있기는 해도 클래식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1993년부터 등장한 영원한 숙적 Feather McGraw 가 다시 등장한 것이나, 장르 영화의 패스티쉬 흔적이 살아 있는 태도 등은 그 고전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클레이 애니메이션은 태생이 지나칠 정도로 물리적이고 소위 아날로그라 불리는 영역에 많은 것을 기대고 있는 매체다. 시대적 조류에 역행하는 방식을 고수하지 않으면 제작할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작품의 가치는 완성했다는 사실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게다가 이번 <복수의 날개>의 서사는 바로 그 시대의 변화와 기술 발전이라는 측면에 테마를 두고 있다. 새로울 것 없는 구성이긴 하지만 아드만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테마가 더 효과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또한 영화는 기술 발전(의 산물)이 인간 사회의 구성원들과 어떻게 영합하는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의 방식을 고수하면서도 대안적이고 진보적인 방식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제작진들의 태도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3.

근래 즐겁게 감상한 두 작품들은 지금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시대 흔적들을 서사-스타일 요소에 담고 있었다. 이 시대에 필요하고 또 유효한(심지어 유용한) 텍스트 였다. 없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나 사라진 것들 가운데 현재 다시 필요한 것들을 생각해 보는 그 모든 과정에는 경험과 소통이 필요하다. 지금은 관계 단절은 물론이고 직접 경험의 기회 또한 갖기 어려운 시대다. 원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행동은 시각(화면을 보는 것), 촉각(화면을 터치하는 것)에 의지하고 있는 시절이다. 이쯤 되면 거의 직접 경험의 단절 혹은 기회 박탈이 당연하게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편리와 효율이라는 미명하에 자본주의 인간사회는 점점 간단한 움직임으로 생활을 해결할 수 있도록 발전해왔지만, 사실 노동의 성질과 환경은 크게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그 인식을 희석시킨다는 점에서 인간 행동의 가치는 퇴색되고 있다. 작금의 많은 인간 문제가 여기에서 발생한다. 어쩌면 미래를 잘 반영하고 매체로서 의미를 획득하는 많은 작품들은 한동안 이런 문제를 파악하여 그 핵심에 있는 인간의 몸과 물리 성질(<서브스턴스>처럼 몸이 갈라지고 피가 튀고 육체-육욕의 스펙터클이 펼쳐지는, 혹은 주먹을 날리거나 펭귄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인간의 지문이 묻히는)을 탐구하는 작품들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육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페드로 알모도바르나, 20년 전부터 인간은 동물이라고 주창하며 역사의 아픔과 인간 육신에 대한 소재를 즐겨다루었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생각나는 한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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