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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인형 May 18. 2023

정말 죄송합니다만......

저는 과일을 예쁘게 깎지 못합니다.

나는 하루 동안 내가 잘하지 못한 것들을 종이에 적는 쓸데없는 버릇이 있다.

그것들은 나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에너지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로 나 스스로를 괴롭히고 침체시키는 작용을 한다.

어떤 날은 잘하지 못한 것이 '날씨에 맞지 않는 옷차림'이기도 했고 어떤 날은 '좋아하는 음식만 많이 먹지 않기'가 되기도 했는데 매일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것 중에 빠지지 않고 적게 되는 한 가지가 있었다.


거절하기.


그냥 거절이 아니라 김 선생님처럼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서 상대방으로부터 공감도 받게 되는 그런 거절.

나도 좀 잘해보고 싶어서 인터넷 검색창에 거절과 관련된 키워드를 입력하고,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의 특징',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하기' 등과 같은 글을 찾아 정독해 보기도 했지만 실전에서는 상대방에게 오해를 사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결국 '거절하기'를 포기한 나는 머리맡에 차곡차곡 써지는 거절하지 못한 일들이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곤 했다.


......


"선생님! 선생님!"

부장선생님이 급히 손짓을 했다.

"저거, 저거 깎아서......"

부장선생님이 계단을 뛰어올라가며 가리킨 현관 앞에는 과일을 보기 좋게 담아 금박테두리의 분홍색 리본을 묶은 과일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김 선생님이 부장선생님의 뒤를 따라 올라가더니 상황을 파악했는지 터덜거리며 내려왔다.


"원장님 손님이 오셔서 과일 깎아서 내오라는 말씀이신가 봐."

"네......"

"와. 배 진짜 크다. 선생님, 과일 깎을 줄 알지?"

"네? 아, 아뇨! 저 진짜 못 깎아요!"

"그냥 사과만 깎자. 망고랑 파인애플은 말고. 그건 할 수 있지? 오늘은 내가 손가락이 좀 아파서. 내가 교무실에서 전화받을 테니까 선생님이 좀 깎아줘. 부탁해!"

"아니, 저......"


김 선생님은 바구니를 조리실로 옮겨 과일을 꺼내놓더니 교무실로 사라져 버렸다.


가만. 칼이랑 도마가 어디에 있나......

조리실에 들어올 일이 별로 없던 나는 과일을 깎기 위해 필요한 도구들을 찾아 조리실 안을 살피다가 조리대에 덩그러니 놓인 과일들에 시선이 멈추자,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가 깎아서 입에 밀어 넣어주시는 과일을 먹어만 봤지, 내 손으로 깎아본 기억이 없다.

변명을 하자면 나는 희한하게도 여자들이 다 좋아한다는 과일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

아침 사과가 금이라지만, 빈 속에 먹으면 쓰리기 일쑤고, 겨울밤에 이불속에서 귤이나 조금 먹을까.  


히잉. 갑자기 어떻게 사과를 깎아.


나는 엄마가 나를 위해 깎았을 수많은 사과들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어 칼을 잡았다.

사과를 깎기 위해 다섯 손가락에 골고루 힘이 받치도록 펼쳐 단단히 잡고 우묵하게 파인 꼭지 옆으로 도톰하게 솟은 표면에 칼을 꽂아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 내 칼을 받아낸 사과의 과육이 칼자국을 따라 깊게 파이고, 칼이 지나간 곳의 사과껍질은 감자칼로 베어내듯 조각조각 떨어져 내렸다.

어떻게 어떻게 깎아서 접시에 담고 보니 거칠게 깎아진 사과조각의 표면은 손 떼라도 묻은 듯 벌써부터 갈변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욕먹을 것 같은데.

걱정을 하면서도 쟁반에 포크를 챙겨 올리는데 김 선생님이 조리실로 돌아왔다.


"다 되었어?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제가 과일을 깎아본 적이 없어서요."

"어머!"

"이상하죠. 어떡하죠?"

김 선생님은 거뭇한 사과조각들이 올려진 과일 접시를 보고는 짧은 탄식과 함께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올려드리고 올게. 교무실 좀 봐줘."

"아, 감사합니다!"

지저분한 과일접시를 올릴 자신이 없던 나는 김 선생님의 호의에 진심 감사한 마음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왁자한 소리에 나가보니 김 선생님은 부장선생님과 원장님, 초로의 낯선 남자손님과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하하하. 그러니까 말이에요."

"아니, 제가 전화를 받고 있어서...... 막내선생님이 과일을 못 깎는 줄 알았으면 제가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그게 뭐 선생님이 죄송할 일이야. 이 선생님은 말이라도 참 예쁘게 잘하네."


남자손님은 현관 앞에서 신발을 찾아 발을 집어넣으며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이쁘장하게 생겨서 과일을 그렇게 못 깎으면 어떻게 해. 연습해요, 어머님한테도 배우고. 그래야 나중에 이쁜 딸 낳는 거야."

김 선생님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나의 팔뚝을 팔꿈치로 꾹 찔렀다.

"맞아요, 그렇지?"

"하하, 하하하......"

부장선생님과 원장님도 나의 대답을 재촉하듯 박수를 치며 과장된 웃음소리를 냈다.


"네......"


......


남자손님이 인사말을 건네며 떠나자 원장님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아이 진짜. 사과도 하나 못 깎아. 창피하게."


부장선생님은 포크가 꽂아진 채 이에 베인 자국이 선명한 사과조각이 뒹구는 과일 접시를 들고 와서 나를 불렀다.

"선생님, 이게 뭐야. 손님 오셨는데. 못 깎으면 손대질 말던가."

"그래서 제가 못 깎는다고......"

"뭐야. 나중에 시집가서 시어머니한테도 저 과일 못 깎아요. 그럴래?"

"부장선생님, 화 푸세요. 죄송해요...... 대신 제가 이거 정리할게요. 다른 과일도 있던데 보실래요?"

김 선생님은 격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가던 부장선생님의 손에서 접시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부장선생님의 팔짱을 끼며 조리실로 향했다.

......


그리고 이렇게

거절해서가 아니라

내가 거절하지 못한 일이 되려 원망으로 돌아온 날도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오늘의 잘하지 못한 일'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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