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지석 Oct 07. 2024

[브런치 표류기] 4일 차

사랑.. 그놈

  릴러말즈의 '만남은 쉽고 이별은 어려워'라는 노래가 있다. 하지만 내 현실은 만남도 어렵고 이별은 더 어렵다. 또한 사랑은 두렵기까지 하다.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고요? 싫은데요. 



  20살이었다. 처음 그녀를 본 날을 잊지 못한다. 대학교 첫 수업, 친구에게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라며 소개를 받은 같은 과 여자애.


  이름도 얼굴도 처음 봤지만 죽어도 혼자서 밥을 먹기 싫었던 나는, 친구에게 그녀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친구는 그럼 친하게 지내라며 소개를 시켜주었다.   


  그녀와 나는 첫날 학교를 같이 가기로 했었다. 학교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만나서 가기로 약속을 했지만, 단둘이 가는 것이 망설여져 셔틀을 놓쳤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곤 곧바로 택시를 잡아 학교로 달렸다.

 

  학교의 도착해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디야?

-넌?

-나 엘리베이터 앞

-거기서 기다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단지 20살, 그 숫자가 주는 푸른 향과 대학교 첫날이 주는 설렘만이 심장을 두근두근하게 만들었는데, 긴 복도 끝에서 뻔한 로맨스 영화의 연출이 과장이 아닌 사실적인 묘사라는 것을 그날 처음 깨달았다. 뿌예지는 배경과 정적, 그리고 그녀의 몸 바깥을 두른 환한 빛.


  청바지의 흰 티, 긴 연갈색 머리를 내리며 왼 손에는 A4투명케이스를 끼고 오는, 그녀는 '첫사랑'을 입고 온 사람 같았다.


  같은 과를 다니며 자주 붙어 다니니 사귀지도 않았을 시기에 일찍 소문이 났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아버지의 말씀에 항상 귀를 기울이며 자랐고,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내게 이런 말을 자주 해주셨다.


 "아들, 남자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그날은 학교에서 늦은 시간까지 여럿이 모여 과제를 마치고, 집 방향이 비슷했던 그녀와 나 단 둘이만 버스를 타고 가고 있었다.


  막차가 직전이었지만, 늦어 위험하다는 핑계를 대며 우리 집 앞을 지나쳤다. 그녀는 괜찮다 말했지만 귀에 걸린 입꼬리를 미처 신경 쓰지는 못했다.


  향이 났다. 아직 벚꽃이 피려면 이른 시기인데 분명한 향이 났다.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20살이었고 그런 감정 앞에서 뒤로 물러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어떤 말을 했는지는 비밀로 둔다..


  단지, 난 말했고 그녀는 고민 끝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서로를 껴안았다. 그렇게 잡은 손은 2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추억과 그리고.. 고통을 남겼다.


  군대를 들어가기 직전, 우리는 평소처럼 싸웠고 그녀는 평소처럼 싸움 끝에 헤어지자 말했다. 다음날 나는 평소처럼 그녀를 달래고 잡아보았지만 그것만은 평소와 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감정이 없어"


  라고 말했다.


  그 후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전부 잠깐 스쳤을 뿐 내 마음을 주지도 두지도 못했다. 처음에는 이별이 무서웠고, 후에는 이별이 두려웠고 지금은 사랑 자체가 무섭고 두렵다.


  이렇게 한심한 숨만 뱉는 나를,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신기하다. 때로는 신이 나를 두고 장난을 치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녀들 중 내 첫사랑을 부러워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때, 네 앞에 있었으면 나를 사랑했을 거야?"


  "아니"라고 말했지만,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그녀는 내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나도 사실은 잘 모르겠다.


  그녀는 내게 상징적인 사람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20살 그땐 모든 게 처음이었다.


  모든 게 처음이어서 설렘은 달콤한 행복을 배로 더 했고, 모든 게 처음이어서 아픔은 독한 상처를 배로 더 했다. 하지만 처음은 단지, 처음이어서 용서가 되고 처음이어서 더 깊은 감상에 빠진다.


  그녀가 처음이어서 잊지를 못하는 건지 아니면 그녀였기에 잊지를 못하는 건지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녀를 잊고 싶다. 하지만 잊을 수 없다. 여전히 피고는 지는 한 줄기 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게 미련이라면, 안쓰럽고

  이런 게 사랑이라면, 불쌍하다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 표류기] 3일 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