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중독 부작용 5] 카톡 대화 저만 힘든가요
이상하다. 왜 이렇게 카카오톡 메신저(이하 카톡)가 안되지?
카톡 대화창에서 메세지 전송을 몇번이나 눌러도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뉴스를 검색해보니 카톡이 먹통이 됐다는 기사가 속보로 전해졌다. 하루가 지나면 되는줄 알았는데 하루가 더 지난 월요일이 되서야 카톡이 원활해졌다.
카톡이 안 되니 세상이 숨죽인듯 조용했다. 새삼 신기한 경험이었다. 주말에는 정말 급한 일 아니면 카톡 사용을 자제하고 있었기에 "내 의지가 아니라 바깥 환경에 의해 안되는 것도 좋구만"하면서 크게 신경쓰지 않은 상태로 시간이 지나갔다.
그런데 카톡이 원상 복구되고 나서 관련 기사가 수천건이 나오는걸 보았다. 고작 카톡 하나 안됐을 뿐인데라고 말할 수 없을 지경.
그날 생일자들은 그동안 뿌린 카톡 선물을 받지 못했다는 소소한 사연부터. 카톡으로 택시 운행을 하는 기사들이 손해를 봤다는 기사. 급기야 주말에도 업무지시를 하는 상사가 카톡을 안보내서 환호한다는 직장인들까지. 카톡 하나 때문에 웃지 못할 일들이 넘쳐났다.
어느 순간부터 스마트폰을 열면 카톡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알람이 울리지 않았는데도 손가락은 노란 버튼을 누르고 있다. 심심할때면 다른 사람들의 업데이트 된 카톡 프로필 사진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생일자가 발견되면 선물을 하기도 한다.
스마트폰앱 중 자주 쓰는 앱이 카톡이다. 스마트폰 과사용의 주범일만 하다. 수시로 들여다 보게 하는 카톡때문에 피로함을 느껴 탈퇴를 해보기도 했지만 하루 이틀 지나 다시 돌아왔다. 카톡은 이미 중독돼 벗어날 수 없는 마약같은 존재다.
이런 와중에도 단톡방 활동이 부담스러워, 회사 등 업무를 포함한 모든 단톡에서 과감히 탈출한 사람도 있다. 라일락님이 그랬다.
처음 그의 얘기를 처음 들었을땐 믿을 수가 없었다.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건가? 불편할텐데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이에대해 라일락님은 "정말 급한 볼일이 있는 사람이 전화하겠죠"라고 씩 웃으면서 말한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는 정작 중요한 일이 있으면 전화를 하면 되고 불필요하게 카톡을 들여다 보는 일이 없으니 다른 일에 더 집중해서 좋다고 했다.
"그동안 카톡 중독으로 시간 낭비하고, 글자때문에 생긴 오해로 인해 쓸데없는 감정낭비가 심했어요. 중요한 일은 전화로 소통하고 꼭 보고 싶은 사람은 만나서 밥 먹고 차마시고 했어요. 인간관계가 나빠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었는데 오히려 소수의 친한 사람들과 더 깊어졌죠. 수백명의 사람이 카톡으로 연결되면 머하나요, 어차피 시간 내고 에너지를 쏟는 사람은 정해져 있는 걸요."
라일락님이 속한 회사 동료들은 회식이나 업무지시가 있을때마다 라일락님에게 따로 연락을 해야 해서 불편해했다. 그런 고충도 다 알고 있을테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만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 그는 단톡에 참여할 권리도 있지만, 참여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왜 모두 단톡에 있어야만 하는건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꼭 필요한 일보다는 그렇치 않은 이야기가 더 많은 곳. 그곳이 카톡이다.
기자를 할때 카톡은 족쇄였다. 데스크가 업무 지시를 내렸을때 5분 안에 답하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도대체 멀하길래 지시 내리는 단톡방도 확인을 안하냐고 성화였다. 그럴만도 한게 데스크 입장에서는 급하게 기사를 써야 할 일이 종종 있었고 담당 출입기자를 '네'로 확인했다는 표시를 한후 해당 기사를 처리해야 했다. 업무를 하는 내내 부서 단톡방은 그냥 열어놓고 수시로 확인했다.
한번은 동료 기자가 후배때문에 아직도 화가 가시질 않는다며 씩씩댔다.
"카톡에 업무 지시를 내린지 1시간이 넘도록 답이 없어 전화를 했는데도 받지 않았어. 그러다 후배한테 전화가 왔는데 자기가 화장실에서 일을 보느라 답을 못했다는 거야. 이게 말이 되냐? 어떻게 사람이 화장실에서 1시간을 있어. 그리고 일을 보면서 카톡에 답을 해도 되는 거잖아. 핑계가 정말 어이가 없네."
대부분의 기자들은 카톡으로 수시로 정보도 교환하고 업무지시도 하달 받는 등 수많은 소통을 한다. 다들 카톡 알림에 예민하다. 지금도 그때의 영향으로 알람이 울리지 않았는데도 확인해보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
나를 비롯한 주변인들이 힘들어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카톡 소통'이다. 카톡은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곳인데 왜 소통이 문제일까. 큰 의미없이 쓴 단어 하나로 인해 인간관계가 깨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어느 단톡방에서 싸움이 벌어졌는데 'ㅇㅇ(응을 간단하게 쓰는 표현)'때문이었다. 저녁식사 잘 하셨나요?라는 질문에 어떤 분이 ㅇㅇ만 덜렁 적어 놓은 것이다. 순간 흠칫했다. ㅇㅇ만 있고 다음 내용이 없으니 좀 무례해 보이기도 했다. 질문을 한 분이 바로 지적을 했다.
"제가 안부를 물어봤는데 ㅇㅇ은 너무 하지 않나요. 아예 답을 마시죠."
"ㅇㅇ은 많이 쓰는 표현인데 답을 한 사람한테 왜 시비를 거나요?"
"저는 ㅇㅇ만 답하면 예의 없어 보여요.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요? 그런 표현 안쓰셨으면 좋겠어요."
"ㅇㅇ만 쓰던 ㅁㅁ만 쓰던 제 자유죠. 당신이 먼데 이래라 저래라예요. 그렇게 불편하면 제가 나가가겠습니다."
단톡을 보면서 손에 땀이 났다. 글자로만 이뤄진 공간에서 진짜 주먹다짐이라도 하듯 싸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톡방은 순식간에 얼어버렸고, 누구하나 답을 다는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은 끝내 화해 하지 못했다.
또 한번은 포도님이 카톡때문에 인간관계를 다 정리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포도님은 오랫동안 키우던 고양이가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상실감과 슬픔으로 하루 하루를 힘들게 보내고 있는 와중에도 단톡은 별일 없다는 듯 활기 찼다. 축하할 일도 있었고, 자랑을 받아줘야 할 일도 있었다. 애써 자신의 감정을 누르며 글을 읽어 나가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너무 가슴이 아프고 힘든 상황인데 내키지도 않는 답글을 적어야 하는게 곤욕이었다. 그들은 그냥 자신의 삶을 살 뿐인데, 정작 글을 읽는 당사자는 폭력적으로 느낀 것이다.
짧은 글이 주는 소통의 한계. 그리고 의도치 않았지만 생겨버린 오해.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나는 우연히 철학자 강신주 선생님의 강연에 가서 속시원한 해답을 찾았다.
트위터, 인스타, 카톡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는 '텍스트주의'가 만연할 확률이 높다. 텍스트 주의란 텍스트가 주는 1차적인 해석을 말한다. 우리가 '사랑해'라는 글자를 보았을때 단박에 느껴지는 그 어떤 사랑의 의미다. 나는 사랑해라는 글자를 보면 따뜻하면서도 오글거리기도 하고 단어가 너무 커서 와닿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사랑해라는 말이 다른 상황에서 쓰인다면 또 어떤 의미가 될까? 부부싸움을 하던 중 남편이 아내에게 "알았어, 사랑해"라고 말했다 치자. 남편은 싸움을 끝내고 잘 지내보자라는 의미로 사랑해를 썼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 아내가 "싸우던 중 사랑 고백이라니, 화를 더 돋우네"라고 했다면 남편의 말을 잘못 이해했다. 맥락 속에서 텍스트의 의미를 찾는 것을 '컨텍스트주의'라고 한다.
강신주 선생님은 이처럼 설명하면서 카톡이나 인스타 등에서 소통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 했다. 각자의 텍스트주의와 컨텍스트주의가 뒤범벅이 되기 때문이다. 트위터가 나온 초창기때 강 선생님도 계정을 만들어 활동하려고 하다가 금방 그만 두었다고 한다. 140자 내로 글자를 적어야 하는데 그 짧은 글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해가 생길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지금도 SNS에 글을 적는 것을 하고 있지 않다.
글자는 읽는 사람의 마음 상태나 지식, 이미 형성된 어떤 프레임 등으로 오역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맥락을 잘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맥락 파악이야말로 문해력을 높이는데 가장 근간이 되는 작업이다.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면 글자를 읽었다고 해도 이해를 할 수가 없고, 이해가 안되면 전체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 발견할 수 없다. 글자만 보았을 뿐, 핵심 내용은 머리 속에 없는 상태다.
우리의 삶은 여러 맥락의 컨텍스트주의로 이뤄져 있으나, SNS의 글은 텍스트주의에 가깝다. SNS에서는 쓰는 사람의 의도와 읽는 사람의 이해가 같기란 쉽지가 않다. 하지만 직접 만나면 상대방의 손짓, 눈빛, 태도 등을 보며 그 사람의 감정, 의도 등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심지어 말이 없는 침묵에서도 어떤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
돈을 직접적으로 주고 받는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온라인 대화보다 오프라인 대화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소한 오해의 확률을 줄이면서 핵심있는 대화와 메시지를 주고 받기 위해 그들은 바쁜 시간을 쪼개 가면서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
강연에서 강 선생님은 이것이야 말로 'AI의 한계'라고 지적한다. 챗GPT 같은 오픈 AI 시스템은 맥락의 이해보다는 텍스트의 1차원적인 전달에서 끝난다. 그것을 가지고 맥락으로 집어 넣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문해력이 뛰어난 사람이 AI를 자기 것으로 더 잘 활용할 것이다.
SNS로는 진정한 소통을 하기가 어렵다는 결론이 난다. 그래도 우리는 그곳에 목을 매고 있다. 너무나 편리하게 손가락 몇 번으로 인간관계를 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하니까. 그 달콤함을 뿌리치기 힘들다. 어떤 단어들을 오해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을 쌓기도 하지만 정작 상대에게 정말 그런 뜻인지 확인하지도 않는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카톡으로 대화하는 어느 가족들. 모여서 같이 게임을 하더라도 말보다는 채팅창으로 이야기하는 어느 10대들.
'사람과 세상을 향한 모든 연결의 시작, 카카오톡'
이라고 카톡 홈페이지에 떠억 하니 써 있다.
우리의 연결 욕구는 하늘을 찌르나, 결코 카톡이 해결해주지는 못하는 듯 하다.
"카톡으로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은데, 나는 누구랑 얘기 한거니?"
짧은 글로 이뤄진 대화가 주는 한계성을 이야기 하던 중, 나의 절친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아니 웃프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카카오톡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