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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Jan 13. 2024

로또 같은 밤


희뿌옇게 동트는 새벽은 이렇다. 기세등등하던 어둠은 몸을 납작 엎드렸고,  엎드린 어둠의 등짝을 밟고 일어서는 새벽은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마치 잔뜩 독이 오른 독사가 혀를 날름대며 머리를 치켜세운 모습과도 같았다. 하루에 단 한 번 어둠과 새벽이 교차하는 순간만큼은 밤이 허리를 넙죽 접었다. 체면치레 같은 허장성세로 비굴하지 않았다. 다만 물러날 때를 알았고 깔끔한 퇴각을 인정했다. 어쩌면 그 모습이 가진 자의 여유였는지도 모른다.

겨울의 밤은 길고 짙었다. 낮의 길이는 눈에 띄게 줄어들어 초라했다. 오죽하면 노루 꼬리만 하다 비아냥을 들을까.  노루꼬리는 고작해야 꼭 움켜쥔 주먹만큼 했고 하얬다. 그 짧은 꼬리를 엉덩짝에 붙이고 바삐 흔드는 꼴은 경망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겨울의 낮이라는 게 그 짝이었다. 반면 밤은 길었고 심연의 바다처럼 깊고 짙었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별들이 해파리처럼 떠올라 유영을 하면 그런 장관이 없었다. 겨울철의 별들만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다가와 반짝였다. 차갑고 투명한 겨울밤은 그래서 찬란했고 아름다웠다.

"이보시게? 그래도 좀 눈을 붙여야 하지 않겠는가? 밤이 깊었네."

낮고 두꺼운 음성으로 그가 잠자리에 들 것을 다시 재촉했다.

"허허, 그거 참.... 어찌 나라고 모르겠는가. 다만, 자리에 누워 멀뚱멀뚱 눈을 굴려야 하는 수고로움은 차라리 고문에 가까워서 이러는 것뿐일세."

새벽이 가까운 시간에 둘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쪽에선 재촉했고 그 반대편에 앉은 사내는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언성을 높이거나 과한 몸짓으로 상대를 위협하지도 않았다. 산사의 새벽을 깨우는 법고처럼 둥둥둥 낮고 무겁게 울렸다.

"그거 아는가? 저 장롱 깊은 곳에 동짓달 긴긴밤의 한 허리를 베어두었다네. 혹여라도 꽃향기 좋은 날에 님 오시거든 서리서리 펼칠까 한다네. 내 그 밤엘랑은 어느 금은보화보다도 더 귀히 펼 터이니 너무 서운해 마시게나."

듣고 있던 그가 입술을 달싹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아, 아닐세...."

등불을 등지고 앉아있던 그가 주섬주섬 채비를 했다.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침묵이 흘렀다. 방을 훤히 밝힌 등불 만이 홀로 바빴다.

한 길 사람의 속내는 알 수 없다더니 겨울밤이 순순히 물러나고 있었다. 수 백 수 천의 깊이로 몰려든 바다가 고작 한 길의 사람의 마음에 잠겼다가 물러나는 순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승과 패가 나뉘는 건 아니었다. 서로의 어깨에 기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고, 토닥토닥 어깨 토닥여주는 위로의 시간이었을 뿐이다. 일확천금의 꿈처럼 혹시나 하는 기대에 동짓달 긴긴밤 한 허리를 묶어두었다. 살랑살랑 꽃바람 불면 또 뉘라서 알까. 어여쁜 꽃순이가 자분자분 걸어오려는지.

봄밤 향기로운 어느 날에 로또의 행운처럼 그가 오렸는지 누가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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