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봄 Jun 25. 2024

끊어냈으면...


모르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이 오늘과 내일이 별개의 것으로 단절돼 존재할 수는 없다. 기초를 다지고 기둥을 세우듯 살아가는 것도 그렇다. 지나온 발자취 위에 오늘을 세우고 내일을 설계할 수밖에는 없다. 그게 이치에 맞고 섭리에 맞는 거다. 자연스럽다는 건 그래서 물 흐르듯 이어져 채우고 돌아 넘치는 거다. 그렇지만 가끔은 단절을 꿈꾸게 된다. 칼로 물 베듯 두리뭉실 이어지지 않았으면 하고 소원한다. 무 자르듯 싹둑 잘라내어 새로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럴 수 없음을 모르지 않음에도 그렇다. 허무맹랑한 꿈이라서 씁쓸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오늘까지만 된통 아프고 내일부터는 씻은 듯 멀쩡할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할까. 골골 팔십이니 뭐니 하는 말은 그래서 귀만 시끄러울 뿐이다. 다들 위로랍시고끊어냈으면... 건네는 말이겠지만 손톱만큼의 위로도 되지 못한다.

있지도 않은 지어미婦를 애써 소환해 부부夫婦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다. 두리뭉실 끊어내지 못하는 것들이 오늘로 이어져 고개를 든다. 잠들기 전의 고통이 눈을 떴을 때 어제처럼 인사를 하고, 긴 한숨 쏟아내는 마음이 어제와 다르지도 않았다. 아, 이런 젠장! 월요일이 월요일이었으면 했다. 휴일이 지나고 다시 새로운 한 주가 열리듯 그렇게 말갛게 태어난 몸으로 새로운 날을 살았으면 하고 소원했다. 뻔히 빈말에 지나지 않음을, 허망한 소원임을 알면서도 머릿속 가득 생각을 띄우는 건 그만큼 이어지는 것들이 징그러워서 그렇다. 비가 오려나보다! 말 하나 툭 뱉는 건 일기예보를 봐서 그런 게 아니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찌뿌듯한 느낌은 최첨단 기기들이 알려주는 일기예보에 밀리지 않는다. 웃픈 얘기다. 웃기고도 슬픈 얘기지만 피할 수 없는 얘기라서 그러려니 자위한다.

그래서 그런가 몇 년에 걸쳐 어렵게 찌운 살이 모래알 빠져나가듯 야금야금 빠져나갔다. 찌우는 건 태산을 옮기듯 어려운데 빠지는 건 식은 죽 먹듯 너무 쉽다는 것도 슬프다.

"몸무게 한 번 재 볼게요?"

신발을 벗고 올라선 체중계의 숫자가 빠르게 오르내렸다. 책상을 짚었던 손을 떼고 숫자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간호사의 말 한마디가 머리를 때렸다.

"어머.... 지난번에 오셨을 때보다 살이 많이 빠지셨네요."

"아.... 네. 요즘 좀 아팠습니다."

얼버무렸다. 딱히 손맛이랄 것도 없는데 조물조물 나물 하나 무치듯 말을 얼버무렸다. 뒤죽박죽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인생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소원 두엇 있었다. 뭐 대단한 소원도 아니다. 누구나 그렇게 사는 거라서 딱히 소원이요, 꿈이라고 얘기하기에도 낯부끄러운 그런 소원이 있었다. 하나는 남들처럼 뽀얗게 살을 찌워봤으면 했다.

"어머? 너무 마르셨네요."

바지 하나 사려면 늘 듣던 말이 싫어서 갓난쟁이 뽀얀 살이 부러웠었다. 나도 한 번 포동포동 살을 찌워봤으면 하고 소원했다. 결국은 그것도 물 건너간 소원임을 재차 확인하고야 말았다. 너무 야무진 소원이었구나 하고 물러선다. 끌어안고 가기에는 발걸음이 무겁다.

해 질 무렵 방에 불을 밝히고 두런두런 하루를 떠들기를 소원했다. 어여쁜 그대 달처럼 바라보며 지나온 하루를 얘기하고 싶었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사랑한다 고백하고 싶었다. 알콩달콩 하루는 고소할 터였다. 깨를 볶듯, 콩을 볶듯 고소한 황혼을 꿈꾸었다만 그것도 너무 멀리 달아난 꿈이 됐다. 소원이 과했을까? 불 꺼진 방에서 맞이하는 저녁은 그래서 헛헛하고 쓸쓸하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것들이 바람처럼 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김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