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썼다

오늘의 날씨, 맑음...

by 이봄

익숙한 동작으로 공책을 꺼내고 볼펜을 찾아 들었다. 늘 하던 일이었으므로 익숙하지 않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구 저쩌구하는 시시콜콜한 일상을 적었으니 일기장이다. 오늘은 몇 시에 일어나고 김치만으로 차려진 만찬(?)을 먹었다느니 하는 소소함이 전부였지만 의식을 치루듯 옷매무새 가다듬고 치루는 경건함이 있었다. 하루를 정리하는 의식과도 같았다.


"잘 자요, 그대!"

인사를 나누고 나면 그는 혼자였다. 애가 닳도록 사랑한다고 해도 함께 하지 못할 상황이 있고, 쳐다보기 싫어 진져리 친다고 해도 껌딱지로 붙어있어야 하는 게 인생이야 하면서 볼펜을 들었다.

하루 몇 자 적어 이렇게 살았어요, 하면 그만 일 수도 있는 일기를 미루고 미루다가 마침내, 그날 비가 내렸는 지, 해가 쨍쨍했는 지도 모르고서야 난리법석을 떨던 일기를 쓴다.


손바닥 바짝 펴고 회초리로 눈물 짓던 때였다면 동그라미 그려놓고 날씨 맑음 한다던지, 구불구불 말풍선 닮은 구름을 그리고서 날씨 흐림을 썼겠지만 나이가 나이인 지라 더는 구름 따위나 해는 그리지 않았다. 회초리로 무섭던 선생님은 어떻게 사시는 지? 더는 궁금하지도 않을 세월이 지났다. 지금도 웃기는 건 일기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를 산수숙제 검사하듯 펼쳐놓고, '참 잘 했어요!' 도장을 찍는 거였다.

"뭘 잘했는데요?"

묻고 싶은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일기를 남자는 매일 쓴다. 그것도 의식을 치루듯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쓴다. 특별할 것 없는 날에도 마른 수건 쥐어짜듯 의미를 찾고, 어쩐지 부담스럽다는 일에도 구슬리고 다독여서 굳이 이유를 붙였다. 그래야만 하루가 온전히 마무리되는 기분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웬지 기록하지 않으면 오늘이 증발할 지도 모른다는 강박이 있을 지도 모를 터였고, 그만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 거기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오늘 남자는 그녀에게 시를 한 편 읽어줬다. 오래 전부터 좋아하던 시였다. 처음 그 시를 읽었을 때 느꼈던 강열함이 좋아서 잊혀지지 않던 시였다.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그때의 감정이 오롯이 되살아나 심장이 떨렸다.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평소 남자가 꿈꾸던 사랑이 거기에 있었다.

길지 않은 시를 들려주고서 남자가 말했다.

"어땠어? 참 예쁜 시지? 내 마음이야...."

"응, 정말 좋다. 니가 그렇게 물으면 나도 바로 '응'하고 대답할 거야"


남자는 그녀에게 들려줬던 시를 정성스레 옮겨적었다. 동그라미도 커다랗게 그리고서 햇살도 몇 개 그렸다. 그리고는 이렇게 썼다. 오늘 햇살이 눈부셨다. 마치 꿈을 꾸듯 무지개 뜨고, 천상의 나팔 소리 요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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