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당연하지!
유목민의 피가 살아남아 펄떡였다. 길을 만나면 심장이 뛰고, 시선은 이미 아득히 먼 지평선에 고정됐다. 멈출 수 없는 방랑벽이 혈관을 타고 꿈틀거리는 게 분명했다. 계절이 바뀐다거나 남풍이 불쑥 찾아들면 잠들었던 방랑벽은 되살아났다.
곧게 뻗은 가로수가 도열하듯 늘어선 길을 만나면 배낭을 짊어지고 떠날 궁리가 먼저 들었다. 위엄을 갖추고 마치 개선장군을 환영하는 의장대라도 사열하듯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발걸음은 가볍고 머리는 온통 낯선 거리를 두리번 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거리와 그만큼 낯선 얼굴은 긴장감으로 다가서고, 활 시위처럼 당겨진 근육은 파르르 떨었다. 설레는 떨림이다.
장돌뱅이는 소금으로 흩뿌려진 메밀꽃을 보면서 오일장을 떠돌고, 난장의 북새통에 뒤섞이면 심장이 뛰었다.길에서 잠들어도 좋았다. 머무름이 불편한 사람들은 너나 없이 봇짐 하나 들쳐메고 바람으로 떠돌았다. 고이면 썩는다, 는 말 가슴팍에 흉터처럼 새겨놓고 길 위에서 자유로왔다. 히말라야의 고산준봉을 떠도는 장돌뱅이는 찻꾸러미보다 가벼운 목숨을 한 잔의 차 홀짝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바짝 마른 야크 똥 신주단지 모시듯 불을 붙여 차를 끓이고, 어디서 죽어도 그만인 몸뚱이를 덥혔다. 그래도 고여 썩는 물은 싫다고 했고, 쾌쾌한 바람은 더더욱 싫다고 했다. 자유롭게 살다가 바람으로 흩어질 영혼은 천형으로 받아든 자유가 세상의 전부였다.
시원스레 도로를 질주하는 차를 보면 떠나고 싶었다. 산마루 느릿하게 넘는 구름을 봐도 그랬고, 하늘에 남겨진 비행운을 보면 어디 먼 외국이라도 떠돌고 싶었다. 어디라도 상관이 없었다. 단지, 나무로 뿌리내려 머물고 싶지 않았다. 느닷없이 소나기가 내리고 흙냄새 눅눅한 날이면 훌쩍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아프리카를 떠날 때부터 유랑은 시작됐고, 검거나, 누렇거나, 하얗게 분칠을 했다고 해도 피는 어차피 붉었다. 떠도는 삶은 언제나 불안했고, 수시로 목숨을 위협받았지만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움이 좋았다. 머물러 농사를 짓고, 소 몇 마리 우리에 가둬 젖을 짤 때부터 더는 자유롭지 못했다. 안전이 보장되고 배 곯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스스로 목줄을 메고 족쇄를 채웠을까?
하면 안 되는 것들이 정해지고, 해야만 하는 것들이 생겨났을 때, 구속되거나 속박되지 않은 영혼은 그나마 별을 좇고 바람을 따랐던 족속들 뿐었다. 가두지 마라. 가두지 마라. 말을 곱씹으며 당겨진 시위처럼 살던 족속은 여전히 별 뜨고, 해 지는 땅에서 자유로왔다.
흉내라도 내고 싶었을까?
내 심장은 오늘도 펄떡이고, 피는 여전히 붉다. 길 없어도 떠나고 싶은 마음은 잠들었다 깨어나길 반복하고, 갇혀 배부른 오늘은 못내 못 마땅하다.
남들이 이러니까 너도 그래야 한다거나 '세상은 원래 그래!'하는 말이 때로는 얼마나 위협적인 것인 지.
"더는 부유하지 않아도 좋을 포구 하나 만났으면 좋겠어"
얘기를 하다가도
"난, 뿌리 내려 거목으로 크고 싶진 않아!"
지껄이게 되는 방랑벽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또 이렇게 주절거리기도 해.
"난 네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어!"
"정말?"
"응, 당연하지!"
새벽, 바삐 달려가는 차가 적막을 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