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를 버렸습니다

어차피 자물쇠도 없는 나입니다

by 이봄

열쇠가 필요없는 집에서 꼬박 4년을 살고 다시 한 달여를 더 살았습니다. 지켜야 하는 게 없으니 자물쇠가 없습니다. 자물쇠가 없으니 열쇠는 더더욱 필요가 없지요. 물론 자물쇠와 열쇠는 쌍으로 만들어져 하나의 몸뚱이로 팔리는 거라서 열쇠와 자물쇠를 따로 얘기한다는 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따위의 논쟁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랫만에 열쇠를 만지작거렸습니다. 바지춤에 넣은 열쇠꾸러미가 묵직했습니다. 아는 사람의 차를 잠시 가져온 덕에 만난 열쇠입니다. 이 녀석도 태어난 지 꽤나 된 녀석이라 패인 홈마다 녹이 벌겋게 슬었습니다. 곧게 뻗어 윤기 자르르 흘러야할 몸뚱이는 어정쩡 휘어 보기 애잖합니다. 등 굽은 노인이 따로 없네요. 세월의 무게는 쇠로 만들어진 몸뚱이도 비껴갈 수가 없었나봅니다. 녹슬고 휘어져서 볼 품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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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날의 장맛비처럼 종일 비가 내리더니 날이 바뀌고, 새벽이 오도록 그치질 않네요. 자물쇠를 걸어잠그지 않는 집이라서 그럴까요? 묻지도, 허락도 구하지 않고 월담을 합니다. 아닙니다. 담장만이 아니라 내 마음을 제 집 드나들듯 오도방정으로 넘나듭니다. 때로 싱숭생숭 마음을 헤집다가 달아납니다. 갈피를 잡을 수 없게 조롱질 하다가 낼름 혀 빼물고 달아납니다. 웃기는 건 그렇더라도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미워는 커녕 미소짓게 되는군요.


그대 자정을 조금 넘겨 오셨더군요. 나는 그대 기다리다 자정을 조금 남기고 잠들었습니다. 불과 사십여 분 남짓 시간이 비껴 그대를 만나지 못했지요. 나 일어났다고 그댈 깨울 수 없었습니다. 오늘만 날도 아니고 쇠털 같이 많은 날들과 시간이 있는 걸요. 언제든 오시어요. 대문도 없고, 조그만 자물쇠 하나 걸어두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이어진 마당엔 하늘마저 커다랗게 내려앉았습니다.

오가는 것들 발길 마다하지 않아요.바람도 한 품 머물다 가도 좋구요, 햇살이야 몇날며칠 봇짐을 푼다면 쌍수를 들어 환영할 터입니다. 하긴, 어차피 오지 마라 얘기한들 들어쳐먹을 녀석들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대는 다릅니다. 오시는 길, 대빗자루로 말끔이 쓸어놓겠습니다. 묵은 낙엽 하나라도 뒹굴지 못 하도록 쓸고 닦아 빛내어 놓겠습니다. 사분사분 밟아 오시어요. 혹여라도 나 없는 날이거든 오늘처럼 다녀간다 쪽지 한 줄 남기시어요. 쪽지만으로도 헤벌쭉 행복한 나입니다. 늘 문은 열어놓겠습니다. 열쇠는 애저녁에 버렸습니다. 당신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바람으로, 구름으로 넘나들어 머무시어요. 오시는 걸음이 반갑습니다. 걸음마다 꽃 피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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