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밤 하얀 손톱달이 뜬다
어린 누이와 나란히 대청에 앉아 있으면 어미는 이내 손절구에 곱게 찧은 봉숭아 꽃잎 손톱 위에 올리고서 무명천 길게 찢어 꽃잎 떨어지지 않게 두르고는 하얀 실로 동여맸지.
"예쁘게 물들어라! 예쁘게..."
주문처럼 외셨다. 고사리 손 조심스레 가슴에 포개고서 누이와 나 대청마루에 누워 별을 헤듯 잠들었다. 부잡스런 몸짓에 행여나 묶어둔 꽃잎 떨어질까 조심조심 누워서는 죽은 듯 꼼짝하지 않았지. 그렇게 두어 시간 낮잠에서 깨어나면 손톱엔 붉게 꽃물이 들고, 입가엔 미소 한 줌 별처럼 빛났다.
고향 까마귀만 만나도 반갑다는 타향에서 봉숭아꽃을 만났다. 길가 버려진 땅에 제 알아서 나고, 알아서 꽃을 피웠다. 누구 하나 곱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꽃은 다만 바람에 한들거리며 피어있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한달음에 달려가 쓰다듬으며 바라보았다. 유년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꽃이라서 더욱 반갑고 정겨웠겠지.
꽃잎 따다가 여름이면 늘 꽃물을 손톱에 들이고는 했었다. 붉게 물든 손톱 며칠이 지나 자라나면 손톱머리에 하얀 손톱달 예쁘게 떴다. 그 달이 예뻐서 여름이면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였다. 오래된 추억만이 아니다. 지난 해에도 나는 손톱에 곱게 물을 들였었다. 꽃물을 들이려고 백반도 구해놓고 무명실도 준비했지. 첫눈 내릴 때까지 꽃물이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나 하는 얘기야 애저녁에 잊은 얘기겠고, 어쩐지 붉은 손톱 바라보면 개구쟁이 나와 수줍던 어린 누이가 보여서 좋았다. 족제비싸리 어린 순 꺾어다가 매니큐어라며 손톱에 바르던 계집애는 반짝이는 손톱보며 해맑게 웃었다.
"오빠, 오빠! 손톱 좀 봐. 정말 예쁘지?"
손 잡아끌며 손톱을 보라던 누이동생과 둘 나란히 앉혀놓고서 꽃물 곱게 들여주던 어미가 거기에 있어 좋았다. 사내녀석이 무슨 손톱에 꽃물을 들이냐 뭐라 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난 그 봉숭아 꽃물을 들인다. 집에 두고 온 백반이 못내 아쉬운 오늘이다. 어디에서 구해야 열 손가락 위에 하얗게 뜨는 손톱달을 볼까? 붉은 밤하늘에 하얀 손톱달 뜨면 덩달아 어미랑 누이랑 달빛 좋은 마당을 서성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섬에서 봉숭아꽃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