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 머리 풀어헤치고 머리를 감던 날
섬엔 종일 비가 내렸다. 내리다 말다를 반복하는 사이, 사이엔 고양이 몇 마리 시무룩 고개를 떨구고 얼굴을 내밀었다. 젖은 털은 어쩐지 숲을 헤쳐 먹을 것 구걸하는 처량함이 속속들이 스며들었다. 한 없이 먼 시선으로 나를 본다. 쳐진 꼬리로는 연신 젖은 마당을 쓸었다. 느리고도 기운 없는 걸음이 비에 젖었다.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양이의 눈은 오이씨 길쭉하게 나를 보았고, 나는 다만 처량하게 작은 눈을 마주쳤다. 나눌 게 없었다. 참치깡통 몇 개 선반에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너 주자고 내가 굶을 수는 없었다. 고작해야 주먹만한 몸뚱이에 그보다 작은 창자 구불거릴 터인데도 채워줄 무엇이 없었다. 쓸데도 없는 마당질이 미안했다. 마당은 이미 앞 서 다녀간 빗물이 한바탕 설겆이로 씻어낸 뒤였다.
"줄 게 없어! 다른데 가서 알아봐. 응?"
줄 수 있는 말은 가라는 말 뿐이다. 줄 게 없으니 일찌감치 발길을 돌려줘야 그나마 동냥이라도 할 눈치였다. 아랫포구에 인접한 해물짬뽕집이나 아니면 그에 이웃한 해녀촌 국수집이라도 기웃거려야 뭐라도 하나 얻어 먹을 판이었다. 그나마 섬에서 버려지는 음식은 거기가 유일했다.
"어서 가봐? 거기도 늦으면 어디 너한테 차례나 돌아가겠니?"
돌아서지 않으려는 녀석들을 돌려보냈다. 걸음 걸음이 천 근이다. 쳐진 어깨는 사람이나 고양이나 청승맞기 이를데 없었다.
장맛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기 전엔 바람이 먼저 불었다. 마른 바람이 섬을 쓸고 나가면 억새는 온통 머리를 풀어헤치고 마른머리를 감았다. 버석이는 몸짓을 따라 서걱이며 거품이 일었다. 섬의 서쪽에서 시작된 바람은 동쪽 해안을 따라 불다가 이내 서귀포 범섬을 징검다리 삼아 한라산을 기어올랐다. 바람 지나는 곳 마다 억새들은 일제히 머리를 풀어헤치고 마른머리를 감았다. 섬에서 나고 자란 것들은 장맛비 몰아치기 전에 몸단장을 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었다. 오래토록 몸뚱이에 젖은 몸짓이었다. 한바탕 바람이 쓸고 간 섬은 그래서 초록으로 빛났다.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섬의 들풀들이 단정했다.
곱게 빗어내린 풀들이 까박까박 졸음을 이기지 못할 때 드디어 후두둑 비가 내렸다. 처음엔 수직의 낙하 고요하다가 점차 빗줄기는 모로 눕기 시작했다. 처마가 길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처음 가파도의 집들을 보며 짧은 처마가 영 불편했다. 집집마다 처마는 짧고 아예 처마라고 얘기하기 민망한 단 한 뼘의 지붕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모로 누워 쏟아지는 비를 맞았다. 처마에 기대어 비를 보다가 뺨을 맞았다. 느닷없는 싸대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무릎을 쳤다. 유독 짧은 처마는 지붕언저리에 바람이 머물지 못하게 하려는 고육지책이었다. 어차피 섬에 내리는 비는 수평의 파도로 담벼락을 치고, 이내 바람벽에 달라붙었다. 우산은 그저 비 내릴 때 예의상 들게 되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굳이 길게 덧대어 처마를 길게 뽑을 이유가 없었다. 비는 어차피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뿌릴 터였다. 창가에 앉아 화살처럼 날아드는 비를 보았다. 묶여버린 발은 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었다. 억새가 머리 풀어헤쳐 마른머리를 감기 전에 배는 끊겼다. 오후 2시 20분, 여객선은 정확히 섬을 떠났다. 언제 다시 배 들어올지 기약 없는 섬에서 섬 것들 만의 연례행사를 보게 된다. 섬은 섬만의 장마를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