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그렇게 생겼어

그렇게 믿으면 그만인 거야

by 이봄

남자가 뒤란을 들어섰을 때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카페로 쓰는 안채와 숙소로 이용하는 바깥채가 이마를 맞대고 있는 좁다란 통로를 벗어나면 서너 평 남짓 자투리땅이 버려져 있었다. 바깥채에 잇대어 작은 창고가 있고 거기엔 세탁기 하나 덩그랗게 노여져 있다. 남자는 빨래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의 손에서 벗어난 공간엔 저마다 돋아난 들풀이 각자의 영역을 고집하며 자라고 있어서 남자는 종종 하릴없는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우왁스런 얼굴로 억새가 가장 큰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담벼락에 기대 큰방가지똥 두엇 도란도란 꽃을 피웠다. 그 옆엔 개망초 한 포기 품도 좋게 가지를 뻗고 올망졸망 하얀 꽃송이를 피워냈고, 땅바닥을 기다시피 엎드린 민들레며 여뀌도 몇몇 움을 틔우고 이파리 나풀거렸다. 들풀들의 해방구였다. 간섭과 억제가 존재하지 않는 무풍지대가 뒤란 서너 평의 공간에서 자유로왔다. 키가 작은 섬달맞이꽃도 악착스럽게 뿌리를 뻗어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고서 밤마다 노란 꽃송이 피워 달을 우러르고 있었다.

남자가 귀 기울여 이야기에 집중했을 때 들려오는 대화는 이랬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달맞이꽃이었다. 밤이 지났으니 노란꽃잎은 이미 다물어져서 이야기는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개미소리였고, 기운 하나 없어 애처로왔지만 듣던 남자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고야 말았다.

"순이야, 넌 어제 달님을 봤니?나만 그랬는지 구름이 가득해서 난 달님을 못봤어! 어쩜 좋니? 평생을 달님 한 번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듣고 있던 순이라고 무슨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 달을 봤을까? 이마가 닿고 코가 닿을 거리에 피고지는 녀석들이었다.

"얘는? 태풍이 온다고 그 난리를 쳤는데 나라고 볼게 뭐야? 속상해 죽겠어 나도. 약도 오르고. 하필이면 우리가 피는 날에 태풍이 뭐라니, 태풍이..."

금방이라도 주먹만한 눈물이라도 뚝뚝 흘릴 기세였다. 그렁그렁 눈물 고인 눈만 꿈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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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태풍으로 시끄럽던 밤에 꽃을 피웠다. 먹구름이 두텁게 드리워진 밤하늘에 달이 얼굴을 내밀 틈은 없던 밤이었다. 싹을 틔우고 이파리 키워가며 달님 한 번 봐야지 염원을 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 밤 섬은 태풍이 온다 한바탕 난리를 쳤으니 말이다.

"얘? 근데 넌 달님이 어떻게 생겼을 거 같니?"

"누가 그러는데 달님은 손톱눈처럼 가녀리고 하얀 얼굴이래. 그런 거 있잖아. 품에 꼭 보듬어주고 싶은 그런 거"

말을 하고는 녀석은 얼굴 빨개지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내가 듣기엔 수박 반쪽 자른듯 둥글고 날카로운 도시남자 스타일이라고 하던 걸. 그런 달님 한 번 봤어야 했는데. 어쩜 좋니?"

말이 끝났을 때 반대편에 있던 녀석이 말을 이었다.

"얘네는 뭐래니? 달님은 저 초가지붕위에 동그랗고 탐스런 박처럼 푸근하고 부드럽다고 했어. 그 품에 안겨 솜사탕처럼 녹는 게 내 소원이었어"

발그레 상기된 얼굴엔 서운함이 달처럼 차올랐다. 어디서 들었는지 달맞이꽃들은 저마다의 달을 가슴에 품고서 애틋하고 서운한 밤을 얘기했다. 손톱눈처럼 하얀 초승달이 있었고, 반듯한 매력의 반달은 수박처럼 붉게 빛났을 터였다. 박처럼 푸근한 보름달이야 동산에 떠올라 휘영청 섬을 밝히고도 남았을 텐데 하필이면 지난 밤이었을까? 이미 꽃잎은 다물었고, 오늘이 지나면 저들의 대화도 더는 없을 터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가 끼어들며 이야기를 했다.

"다 맞단다. 너희들이 얘기한 달님이 다 맞단다. 달님은 꿈꾸는 모습으로 나타나 어둠을 밝히고 대지를 어루만지지. 손톱눈도 되었다가 수박 반쪽도 되고 어느 날에는 박처럼 어여쁘게 동그래지기도 하지. 그러니까 각자 품은 달님 곱게 간직해도 좋을 거야. 얘들아, 알았지?"

사내는 쪼그려 앉았던 무릎을 펴며 씨익 미소지었다. 그래, 아무려면 어때? 남자의 눈엔 그가 세상 제일 예쁜 여인이듯 보이는 그대로 사랑하면 되는 거였다. 비교하고 저울질 하는 순간 '나는 널 사랑해!'하는 입에 발린 고백은 집어치워야 마땅하다. 남자는 오늘도 콩깍지 가득한 눈에 웃음이 만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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