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새

다시 집, 다시 나

by 이봄

사흘 여객선이 끊겼고 남자는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다시 끊었다. 내일은 분명 여객선이 들어오리라는 기약도 없이 막연한 기대감으로 표를 끊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섬에 앉아 할 수 있는 마음의 전부여서 다른 선택의 길이 있지 않았다. 하루나 이틀 더 섬에 머문다해서 세상이 뒤바뀔 것도 없는데 마음이 떠난 섬은 이미 남자에게 유배지나 다름이 없었다. 미친듯이 불어가던 섬의 바람도 머물렀을 때의 바람과 떠나고자 할 때의 바람은 이미 다른 바람이었다. 긴 머리카락 풀어헤쳐 휩쓸리던 억새도 이미 어제의 억새가 아니었고, 방파제를 때리고 부서지는 파도는 더는 짙푸른 낭만을 품지 못했고, 의미를 담지 못한 파도의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소걸음으로 해 지는 시간에 여전히 섬제비는 낮게 비행하며 날벌레를 잡기위해 떼로 날았지만 날개짓에는 힘이 깃들지 못했고, 순간으로 명멸하는 석양과도 같았다. 의미 없는 몸짓들이 섬에 가득할 뿐이었다. 떠나야만 했다. 머물 이유를 더는 찾지 못할 때 엉덩이는 들썩이고 발은 땅을 밟고 서지 못했다. 중력을 벗어나는 진공의 상태가 사흘을 이어졌다. 굳이 뜀을 뛰지 않더라도 둥둥 풍선처럼 하늘을 떠돌 것만 같았다. 몸뚱이의 무게란 게 이렇듯 종이짝처럼 가벼울 수 있구나!, 저문 해를 바라보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여객선이 끊긴지 나흘째 되던 날 섬이 열렸다. 푸른 바다는 잠잠했고, 갯바위에 부서지는 파도는 기분 좋은 샴푸의 그것처럼 보드랍게 거품을 만들었다. 끈적하고 눅진 것들 거품에 씻겨지고 살갗엔 향기가 남았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을 때 아득하게 스며드는 살냄새처럼 갯내가 몰려왔다. 멀리 돌고래 몇 마리 물장구를 치고, 유난히 가깝게 다가온 마라도는 손끝에 닿았다. 한쪽으로 누운 들풀들 빗질이라도 하듯 쓰다듬다가 남자는 배낭을 메고 집을 나왔다. 석 달을 머물러 밥을 먹었고, 잠들었으니 집이라고 말하는 게 옳았다. 굳이 숙소라거나 하는 말로 머물렀던 시간을 겉돌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이 머물고 몸뚱이 담아 쉼을 청하던 집이다. 그와의 속삭임이 어느 바람벽에 흔적으로 남아 있을 터였다.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하고, 마당의 들풀이며 애지중지 예뻐하던 애플민트들 돌아보며 작별을 했다.

"얘들아? 이젠 안녕이야. 잘들 있어!"

말은 쓸쓸했고 조금은 서글펐다. 짧지만 마음 쏟았던 섬이어서 그랬고, 낯설었지만 마음 두었던 카페라서 그랬다. 조그만 꿈 하나 꾸어서 그랬고, 그 꿈이 좋아서 그랬다. 그렇지만 떠나야 할 이유가 분명했을 때 남자는 떠나야했고, 머문다는 생각은 이미 더 큰 서글픔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여객선의 항해는 불과 15분, 가파도 상동항에서 바다를 건너 운진항에 닿는 시간은 짧았다. 15분의 거리를 사흘을 기다려 나흘째가 되고서야 건넜다. 오래 기다려야만 닿을 수 있는 짧은 것들이 어디 한 둘이랴. 십 년을 기다려 보름의 햇살을 노래하는 매미의 삶도 있듯이 긴 기다림 끝에 찰나의 화양연화도 있게 마련이다. 섬에서의 석 달이 그런 매듭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모슬포로 가는 해변길을 걸으며 남자는 매듭 하나 단단히 매고 있었다.

어제와 오늘은 분명 다른 시간이었고, 가파도와 모슬포도 분명 다른 공간이었다. 마음이야 더는두 말 할 나위 없는 일이어서 분명하고 또렷한 선을 그었다. 끝이고 시작점인 모슬포에 서서 남자는 시간을 자르고 공간을 잘랐다. 섬에서 뭍으로 오르는 길은 멀기도 했지만 그만큼 가깝기도 했다. 익숙했던 것들 잠시 내려놓았다가 다시 손에 들 시간이었다. 그가 기다리고 있었고,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형들과 형수가 있었고, 여동생과 귀여운 조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초록으로 동동 떠돌 개구리밥이 수련에 붙어 기다릴 터였고, 수련 하나 예쁘게 필 고무다라엔 참개구리도 한 마리 물갈퀴 활짝 펼치고서 개굴개굴 울 터였다. 게다가 마당 한 구석엔 여전히 물레나물꽃 노랗게 피어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모든 게 그리운 얼굴이었다.

"그래, 가야지? 그리운 것들 꽃처럼 피었을 곳으로 가야지!"

이미 마음은 고향에 닿았다. 천 리 길 멀다해도 마음이 닿으면 지척일 뿐이었다.

그렇게 닷새! 돌아와 누운 방은 눅눅하고 곰팡내 가득했지만 몸은 가라앉고 마음은 풀어져 널부러졌다. 구들장에 달라붙는 몸뚱이와 들꽃에 스며드는 마음이 여기에 있었다. 동화되어 더는 너와 나, 구별이 필요없는 게 이런 걸까? 구분 나무가 선산을 지키고 버려진 돌이 주춧돌이 된다더니 남자는 돌아와 구분 허리를 다독였고, 버려진 돌을 쓰다듬었다. 섬을 떠나 닷새만에 돋아나는 뿌리를 만지작거렸다. 간질간질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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