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은 우연하게 다가온다
새벽이 밝았을 때 카톡이 울었다. 안부를 묻는 문자다.
"잘 올라가셨나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갑자기 제주를 떠나셨다고 하니 걱정이 돼요..."
문자는 궁금함으로 가득해서 줄지어 물음표가 들어있었다. 몇 줄, 꽤나 장문의 문자를 읽는데 이내 문자 하나가 날아들었다.
"통화 가능하세요?"
"아, 네. 괜찮아요! 잠시만요?"
급하게 답글을 보내고 전화번호를 찾는데 바로 띠리링 띠리링 전화기가 운다.
"여보세요? 아, 예... 잘 지내셨죠?"
반가운 목소리가 전화기 넘어에서 들려온다. 나는 이런 저런 말들로 안부를 묻고 그가 궁금해하던 것들을 이야기 해야만 했다. 폭포처럼 질문이 쏟아졌고 그에 비례해 대답의 말들도 폭포처럼 쏟아져야만 했다. 이왕이면 궁금증 한 번에 씻어내게 시원한 물줄기였으면 좋았을 말들이다. 말들의 끝에 매달린 생각 하나가 아침을 열었고, 미적거리던 어스름 새벽을 쫓아냈다. 그래도 제법 되던 인연은 끝나고 그 빈자리에 새롭게 채워지는 인연을 생각했다. 오고 가는 만남과 교차되는 아침과 새벽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봄날을 오롯히 제주에서 보내게 만든 인연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꽃을 사랑하던 사람이다. 들풀 하나 예뻐지면 내게 사진을 보내며 예쁨에 대해 너스레를 떨던 사람이다. 취향이 맞고 취미가 맞는 사람이어서 짧은 석 달이 이렇듯 인연이란 이름으로 맺히는 사람이다. 예쁜 녀석들 공유하고 자랑하던 사람이라서 그랬는지 궁금과 공감이 이른 아침 안부를 넘어 잘근잘근 오징어 땅콩을 줬구나 했다. 그것으로 아침은 시원했고, 바람은 덩달아 상쾌하게 불었다. 거창하거나 많은 기대랄까 하는 것 없다. 그냥저냥 하루가 기쁘면 행복하다 웃는 모지리가 나다. 흔들지만 마라!, 부탁의 말 하고 싶은 놈일 뿐이다.
아침을 너무 거하게 열었던가? 오전부터 날은 뜨겁고 햇살은 따가웠다. 그나마 다행이다 싶은 건 아스팔트의 미친 열감과 시멘트숲이 강요하는 복사열이 없는 산골이라 좋았다. 바닷바람 끈적이는 습도도 가세하지 않으니 그늘에 멈췄던 바람은 성능 좋은 냉매를 몸뚱이에 이고 졌다. 그늘섬 징검다리 삼으면 여름은 개울물 흘러가듯 졸졸졸 소리도 곱게 흐를 터였다.
시원한 벚나무 그늘에서 시간죽이기를 하다 꽃 하나 만났다. 이름도 범상치 않은 범부채란다. 이파리는 얇고 두텁게 길게 뻗어서 마치 부채를 닮았고, 꽃잎은 주황의 몸통에 표범처럼 얼룩무늬 있다고 해서 범부채라고 하는데, 녀석의 이름 알고 보니 영낙없는 범부채가 맞다. 꽃은 여섯 잎 귀여웠다만 꽃을 얘기하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종일 어여뻤던 꽃잎 해질녁이면 또르르 말아 쥔 녀석의 뒷모습이 좋았다. 피었으니 지는 건 당연한 일인데 지는 낙화의 처절함이 찬란한 봄날을 지우고야 마는 꽃들이 어디 한 둘이랴. 툭툭뚝뚝 떠나는 뒷모습이 또 다른 꽃으로 피면 얼마나 좋을까?
꽃잎 치맛자락 또르르 말아쥐듯 말아쥐고서 분분히 석양으로 스며드는 녀석의 뒷모습이 좋았다. 짧지만은 않은 인연 무 자르듯 잘라야 했던 내 뒷모습이나, 무가 됐던 그의 뒷모습은 곱지 않았다. 서로의 욕심에 벌게진 눈 휘번뜩이던 날 선 이별이고 헤어짐이다. 잘잘못을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지는 꽃잎 마치 크리스마스 사탕 지팡이처럼 알록달록 곱게 말아 두 번째 꽃으로 지는 녀석이 예뻤다. 인연의 마무리 얼마나 곱던지 모르겠다.
아침, 띠리링 띠리링 안부를 묻던 그의 마음과 또르르 말아올린 범부채의 뒷모습은 마음이 머물러서 좋았다. 게다가 녀석의 꽃말이 그렇단다. '정성어린사랑'이란다. 어디 정성 쏟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만 그 사랑에다 정성 곱게 어린 마음이란다. 영원한 것 없다하니 분명 사랑에도 끝은 있게 마련이겠지만 그 이별의 순간에도 범부채 또르르 치맛자락 감아쥐듯 험하지 않은 이별이 있었으면 좋겠다. 첫인상의 날카로움보다 떠나는 뒷모습에 은근한 온기 머물렀으면 좋겠구나 하게 된다.
안부를 묻게 됩니다.
"당신 잘 잤나요? 오늘은 어땠나요? 나는 조금이라도 떠올렸겠죠? 당신이 좋아요! 난 당신 덕분에 행복했어요!"
물음표와 느낌표 적당히 어우러져 너무 기울지 않는 날들을 그리게 되네요. 인연은 늘 끝나고 늘 만들어지지요. 우연을 가장한 인연들을 생각합니다. 그렇게 오늘이 열렸고 그렇게 닫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