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늉 한 사발

우물에서 찾다

by 이봄

번갯불 번쩍이면 밭두렁을 내달려 콩꼬투리 퍼런 콩을 우지끈 잘라 개울가로 뛰었다. 하늘엔 먹장구름 사납게 으르렁거리고 먼 산 너머엔 번갯불이 번쩍거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번갯불은 산등성이를 넘을 터였고, 하늘을 메운 먹장구름은 이내 굵은 빗방울을 쏟아낼 기세였다. 둘러앉은 까까머리 사내녀석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솔가지를 꺾어 높다랗게 쌓고서 휘번쩍 내려칠 불길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고소하고 구수한 풋콩의 맛깔스러움으로 헤벌쭉 입꼬리 찢어지고 꼴깍꼴깍 마른침이 넘어갔다. 주둥이는 온통 숯검댕으로 엉망이되고, 콩꼬투리 부빌 손이야 검둥강아지 앞발이 무색할 터였다. 자갈돌 적당히 깔고 앉아서 번갯불 어서 능선을 넘어오길, 그러면서도 먹장구름은 게걸음으로 달아나길 바라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파래서 시렸고, 정오가 아직도 멀었는데도 부는 바람은 잔뜩 달아올라 시원하지 않았다. 틀어놓은 방송에선 연일 폭염특보를 떠들었고, 방송이 귓구멍을 빠져나가기 전에 후끈 열풍이 불었다. 칠 월의 여름은 오랜만에 이름값을 하고 있었다. 늘어진 호박잎은 줄기 끝에서 쪼그라들었다. 호박잎 쪼그라든 틈을 비집고 비름나물은 윤기 반짝이는 이파리 넓게 펴고서 뜨거운 여름을 찬양했다. 누구는 늘어지고 누구는 생기 돋는 교차가 정오를 치닫고 있었다. 아스팔트 곧게 뻗은 신작로엔 헐떡이는 엔진 굉음을 쏟아내며 이른 휴가차량이 꼬리를 물었다. 멀어지는 차량의 꽁무니엔 어김없이 뜨거운 바람 주렁주렁 메달려 아우성을 쳤다. 여름이란 계절은 아우성의 시간이다 싶었다. 단지 몇 도의 기온이 올라 덥다를 입에 달고 사는 것만으로는 여름을 얘기할 수가 없다. 몇 도 오른 기온은 몸과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해서 평정심을 잃고야 만다. 알던 것도 잊게 하고, 뭉근한 기다림은 오간데 없어 조바심만 마음에 들어찼다. 성냥불 그어 불 피우고서 구워먹는 콩은 마음에 자리잡지 못했다. 번갯불 붙잡아서 기필코 콩을 구워먹어야만 하는 시간이 여름이었다.

그래서였을 터였다. 엉뚱한 생각이 떠오르더니 결국 그 엉뚱함에 사로잡혀 몇 시간을 엉뚱함으로 보내고야 말았다. 여름이면 손톱 곱게 꽃물로 치장하고 싶어서 안달을 부리고는 했다. 오래된 습관이기도 했고 오래된 추억이기도 했다. 어미에게서 비롯된 여름날의 꽃놀이다. 투명한 백반 덩어리 망치로 하얗게 빻고, 마당에 붉게 핀 봉숭아 꽃잎 넉넉하게 따다가 곱게 짓이겨 손톱마다 붉은 꽃송이 피워내야 여름은 제대로 여물었다. 그늘 좋은 평상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잠깐의 낮잠이 여름을 풍요롭게 살찌우듯 나는 손톱달 붉게 물들이는 것으로 여름을 완성했다.

며칠 전 마을 온통 뒤져 벙숭아꽃을 찾았지만 꽃은 보지 못했다. 제주를 떠나 서울에 도착했을 때 봉숭아꽃 곱게 핀 것을 보았는데, 고향땅은 아직 꽃을 피워내지 못했다. 여기 저기 꽃송이 맺지 못한 어린 봉숭아만 화단을 채우고 있었다. 어쩌면 못해도 보름의 시간은 더 필요하겠다 싶었다. 때가 되지 않았으니 기다려야만 한다. 아직 때 되지 못해 없는 꽃을 원망한들 뭣하랴. 느긋하게 붉은 꽃송이 피기를 기다려야했다. 자연은 알아서 때를 맞추고 스스로 여물 터였다.

그렇지만 나는 기다리지 못했다. 조바심이다. 굳이 오늘 봉숭아꽃물을 들여야할 이유는 없었다. 없는 꽃을 탓하며 어뚱한 짓을 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는데도 나는 기다리지 못했다. 뭐가 급했을까? 조바심을 내야하는 이유는 몰랐지만 굳이 오늘이고 싶었다. 봉숭아 어린 싹을 뜯고 마당에 탐스런 접시꽃을 땄다. 붉게 핀 접시꽃이라면 봉숭아처럼 곱고 예쁜 손톱달을 만들 것만 같았다.

"접시꽃이라도 충분하겠어. 이 없으면 잇몸이라잖아!"

호기롭게 꽃잎을 따다가 백반도 곱게 빻았다. 그리고 서너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았다.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는데에는 서너 시간이면 충분했다. 호기롭던 말은 '다 이유가 있는 거였어!'하는 자조의 말로 꼬리를 내렸다. 조바심은 서너 시간의 엉뚱한 상상으로 끝을 내렸다. 손톱을 곱게 물들이려면 봉숭아꽃 붉게 필 시간이 필요했다. 기다림은 느린 것 같지만 결국 숲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이 거기에 있었다. 가뜩이나 더운날에 바늘 허리에다 무명실 묶고서 나는 누비옷 곱게 누비려고 했다. 모르지 않았는데 꼭 될 것만 같았던 여름의 아우성이다. 아우성 하나쯤이야 애교일 수도 있겠지만 풍년으로 만발하지는 말아야 하는 아우성이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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