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받아만 줘요

by 이봄

방금 샤워를 끝내고 나온 남자는 끌어안듯 선풍기를 마주하고 앉았다. 바람은 뜨겁고 헐떡이며 돌아가는 선풍기는 날개마다 됫박의 땀방울이 맺혔다. 서로 위로가 되지는 못하는 것들이 어쩔 수 없이 등을 맞대고서 위로인 척 힘겹게 돌았다. 굳이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는 속보라는 이름으로 깜빡거렸고, 반쯤 풀린 눈으로 아나운서는 속보를 읽었다. 마치 다음역은 당산, 당산입니다. 들릴까 말까 헷갈리는 안내방송처럼 말은 허공에서 부서지고, 미친 바람은 도처에서 널을 뛰었다. 연일 기록을 경신하는 서울의 날씨는 드디어 39도를 기록한다고 오도방정 열기를 더했다. 방금 뒤집어쓴 물 한 바가지는 선풍기의 열풍에 무너졌다. 알아서 미친 것들이 마당을 서성거렸다. 달궈진 파란 하늘은 잘 코팅된 프라이팬으로 쇼핑몰에서 절찬리 판매중이었다.일시불이 부담스럽다면 6개월 무이자 할부판매도 가능하다고 호스트는 게거품을 물었다. 그래? 그래라. 어차피 무더위에 이성은 사라지고 균형은 깨졌다. 하늘에서 물고기가 떼지어 놀고 새들은 바다에서 고래와 춤을 춘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날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2018년 여름이 오븐의 빵처럼 여물고 있을 때 탁자 위의 메모지에는 몇 개의 말이 적혀있었다.

"여름, 일요일, 너무 덥다, 몫, 사랑, 2016년 가을, 만남, 당신...."

문장으로 완성되지 못한 말들은 토라진 연인처럼 각자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얽혀 부대끼고 싶지 않은 말들이었다. 팔랑거리는 메모지 옆에는 쓰다 만 붓글씨가 널부러져 있었고, 접시 위엔 까만 먹물만 멀뚱히 고였다. 말하려다 다문 입술처럼 쓰다 만 글씨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몫, 당신 사랑하는 거, 당신 좋아하는 것도 내 몫이야..."

거기까지 쓰다가 남자는 물 한 바가지 끼얹으려 붓을 놓았다.

답지 못해도 욕을 먹고, 다워도 욕을 먹는 날들이 뜨거웠다. 미적지근 뒤뚱거리는 여름이라면 여름이 여름답지 못하다고 핀잔을 줬을 테고, 너무 여름다운 여름이라서 또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답다는 건 뭘까?생각하다가 남자는 그를 처음 본 날을 떠올렸다. 찬바람이 부는 가을에 남자는 그를 봤다. 핸드폰 가득 들어찬 그의 사진을 보고 남자는 직감으로 알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야 만들어질 지는 모르지만 결국 둘은 사랑에 빠질 거라는 걸 알았다.

"첫눈에 반했어요. 그랬죠! 처음 봤을 때 사랑에 빠졌거든요"

눈 똘망똘망 뜨고서 이렇게 말하는 어느 연인을 보면서 남자는 혀를 찼다. 동의할 수 없는 얘기였다. 첫눈에 반한다? 뭐,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사랑에 빠졌다고? 웃기고 있네. 그건 젊음의 치기고 이성의 본능일 뿐이야! 중얼거리고 말았던 남자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사랑에 빠졌다. 2016년 가을이다. 그것도 달랑 사진 한 장에다 글 몇 줄이면 충분했다. 산마루에 번개가 번뜩이고 천둥은 지축을 울렸다. 아름드리 나무가 잡초 뽑히듯 뿌리를 들어내고, 집채만한 바위는 공깃돌처럼 뛰놀았다. 그가 예고도 없이 가슴을 파고드는 날, 세상은 그랬다.

나는 어때야 나다워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날마다 하나의 고민으로 아침을 열고 밤을 맞았다. 고백의 말은 가슴에 가득했지만 어떻게 꺼내 보여줘야 하는 지 고민만 쌓이던 날들이었다. 사랑이란 그랬다. 번개 휘번쩍 내려칠 때 사랑은 찰나에 돋았고 꽃을 피웠다. 그래서 사랑은 아득했고 심장이 뛰었다. 벌써 2년이란 시간이 지난 얘기지만 남자는 생각을 더듬다가 얼굴 빨갛게 붉히고 말았다. 그에게 주어진 몫은 뭘까?어떻게 하면 그 다워서 그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소원 하나 있습니다. 더 바라지 않겠지만 단 1퍼센트 만이라도 그보다 내가 더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정말 당신 사랑해! 당당하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생각이 거기에 닿았을 때 남자는 붓을 들어 문장 하나를 완성했습니다. 빨간 인주 잔뜩 뭍혀서 도장도 하나 찍었습니다. 그대의 봄, 래춘! 남자에게 주어진 몫은 하나입니다. 그보다 조금 더 사랑하는 거, 그게 남자의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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